시골에서 일 년, 시간은 다르게 흘러갑니다

김은상 2023. 12. 3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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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꽃을 보여주며 슬그머니 꽃그늘을 가리기도 하고, 길고 거북한 설명을 덜어내어 무난한 일상으로 만들기도 했죠.

컨트롤러까지 고장 나 돈 먹는 하마의 오명을 벗지 못한 심야보일러, 몇 번을 메꾸어도 비만 오면 어김없이 물이 새는 차양, 생각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해진 별채의 아치문... 막상 닥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상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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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감사하며, 다짐하는 세밑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은상 기자]

타인의 행동은 눈으로 보지만 내 자신의 행동은 마음으로 봅니다. 때론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는 대신 편안한 거짓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꽃을 보여주며 슬그머니 꽃그늘을 가리기도 하고, 길고 거북한 설명을 덜어내어 무난한 일상으로 만들기도 했죠. 그때의 불편한 마음은 들뜬 벽지처럼 거북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세밑이고 그래서 뒤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나의 상상력은 얼마나 빈약했는지요. 돌을 골라 폭신한 카스텔라처럼 만들려 했지만 비 온 뒤 외려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뒤란의 꽃밭, 연 이태 열매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와 대추나무, 울타리처럼 자라주길 바라며 옮겨 심었지만 듬성듬성 잿빛으로 상해버린 황매화...

또 내 역량을 시험하는 시골집은 얼마나 나를 좌절하게 했던가요. 컨트롤러까지 고장 나 돈 먹는 하마의 오명을 벗지 못한 심야보일러, 몇 번을 메꾸어도 비만 오면 어김없이 물이 새는 차양, 생각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해진 별채의 아치문... 막상 닥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상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물은 / 그릇을 닮는다. // 국물은 부엌을 닮고 / 우물은 마을을 닮는다. // 강물은 언덕을 닮고 / 바다는 대륙을 닮고 // 눈물은 / 인간을 닮는다. <채플린 Ⅰ, 이세룡>

나의 정원은 나를 닮아 가고 있을까요? 그동안 아는 척하며 섣부르게 나대던 나의 '고나리질' 때문에 힘들었던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짐작대로 제게 돌아온 질책이나 성적표는 없습니다.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죠. 나는 보기 좋게 잘 가꿔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기로 합니다. 그릇을 키우기는 어렵지만 비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태안 바닷가 낙조
ⓒ 김은상
 
이제 지루한 겨울입니다. 이상 고온이라지만 그래도 아침저녁 한기는 흔한 농담조차 받아주지 않을 것처럼 냉랭하고, 마당 여기저기 겨울 풀빛은 칙칙하게 느껴지며, 텃밭 어귀에 자라던 각별한 기대감은 수그러들었습니다. 바삐 해야 할 일도 없으니 하루가 느긋하다 못해 무료합니다. 겨울 소 팔자라 할까요?

때론 쉼도 감당하기 벅찰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는 이에겐 사무치게 힘든 시기일 듯 합니다. 놀거리도 없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으며, 밤은 지독히도 깁니다. 심심하고 밋밋한 나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채우기도 하고 스스로 무언가 재밋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시뻘건 잉걸불이 아까워 밤을 굽기로 합니다. 얼려둔 밤을 다급하게 씻어 냅다 칼집을 내고 스테인레스 철망에 담아 화목난로 안에 얹습니다. 이따금 흔들어 껍질이 벌어지길 기다리니 구수한 냄새가 집안 가득합니다. 지금 이 깊은 밤에 밤을 굽고 껍질을 까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뭐 이런 재미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속도의 시간을 가집니다. 말라붙은 시래기 속에서 가을의 푸른빛을 발견한 순간, 빈가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투명한 열매로 보일 때, 시간은 이제껏 내가 겪어온 것과 다르게 흐릅니다. 상대성이란 것은 어떤 현상을 보는 느낌과 그것을 통해 전달받는 메시지가 각자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 아닐까요?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20세기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는 트로츠키의 말은 21세기임에도 그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현실이 행운이란 말로 들립니다. 내년에 심을 꽃씨, 나무 몇 그루만 떠올려도 벌써 맘이 설레곤 합니다. 이웃집의 눈 치우는 소리, 밤마다 켜지는 창문의 불빛에 서로의 안녕을 짐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덕분에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으니 살아지는 것인데 지금을 참고 견디며 이 삶에 뭔가 있는 것처럼 나를 속이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합니다. 개똥밭 같은 세상을 떠날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못한 것이랍니다. 2023년을 매사에 감사하는 한 해로 살았다면, 2024년은 뭐든 해보는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모두 행복한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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