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마음 짠해지는 동네 방앗간을 그렸습니다

임명옥 2023. 12. 3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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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올해의 OO] 녹슬어 사라지는 것들 스케치한지 반 년, 그림에서 배운 관찰의 힘

'올해의 ○○'은 2023년을 마무리 하는 기획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도전, 실패, 인물 등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임명옥 기자]

▲ 오래된 방앗간 장터에 있는 여느 날은 문 닫고 장날에 문 여는 오래된 고추 방앗간
ⓒ 임명옥
 
올해는 스케치를 배우며 어반스케치 동아리 모임을 함께 했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보고 그리는 '어반스케치(Urban sketch)'로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각자 주제를 정해서 지역의 사라져가는 것들, 혹은 오래된 건물을 그렸다.

지난 5월부터 함께 해온 모임. 누구는 몇 안 남은 동네 슈퍼를, 누구는 오래된 이발소를, 누구는 국숫집 등을 그리기로 했다. 나는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문득 '방앗간'을 떠올렸다.

나 어린 시절 설명절이 가까워오면 엄마는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져가 가래떡을 빼 왔다. 엄마를 따라 방앗간에 갔던 어린 나는 동그란 기계 구멍에서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길고 하얀 가래떡이 나오는게 신기했다. 

끝도 없이 빠져나오는 가래떡을 주인장이 적당한 길이로 끊으면 밑에 받쳐 놓은 고무 다라이에 흰 가래떡이 푸짐하게 쌓였다. 금방 나온 가래떡을 집에 가지고 와 꿀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쫄깃거리고 담백하고 달콤했던지.

엄마는 적당히 굳은 가래떡을 비스듬히 얇게 썰어 떡국떡을 만들어 놓았다가 설날 아침 떡국을 해 주곤 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었던 설날의 떡국은 어린 시절의 따듯하고 정다운 추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농사를 지으시던 시부모님은 들깨농사를 지어 방앗간에 가 들기름을 짜고 고추 농사를 지어 말린 고추를 방앗간에 가지고 가 고춧가루를 만드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들기름과 고춧가루는 자식인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로 기억되는 부모님 
 
▲ 방앗간 곡물분쇄기 어반스케치 방앗간 안 풍경
ⓒ 임명옥
 
지금은 두 분 다 세상에 안 계시지만, 부모님과의 추억이 깃들어서일까, 나는 여전히 동네 방앗간에서 들기름을 사고 떡국떡을 사 먹는다. 들기름을 사러 단골 방앗간에 들른 김에 주인아저씨께 방앗간을 그릴 건데 사진 몇 장 찍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 아저씨는 '사진 찍을 게 뭐 있나요,' 하시면서도 승낙해 주셨다.

방앗간 안을 돌아보며 나는 곡물분쇄기를 찍어와 그렸다. 농사 지은 고추를 힘들게 방앗간으로 가져가 고춧가루로 만들어 주셨을 시부모님의 노동과 정성이 생각나서였다. 고추가 고춧가루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겉보기엔 참 단순해 보였는데 기계를 스케치하다 보니 손도 많이 가고 복잡했다. 하지만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벨트와 나사와 기둥들을 살펴보며 기계를 조금씩 이해할 것 같았다.  

방앗간 밖으로 나오니 주인아저씨가 수돗가에서 들깨를 씻고 있었다. 내가 사 먹는 들기름이 누군가의 노동을 거쳐 들기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 와 그렸다. 고무 다라이 속 들깨에 눈길과 손길이 가 있는 아저씨의 노동과 방앗간의 풍경을 함께 넣어 그렸다.

방앗간을 그리려 주위를 둘러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동네 방앗간이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에 장날만 문 여는 고추 방앗간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간판과 여느 날이라 문 닫은 가게 모습이 쓸쓸하고 고즈넉해 그려 보았다. 

세월에 빛바랜 풍경... 올해도 방앗간에 갑니다 

방앗간 모습을 찾다가 동네 골목으로 들어와 오래된 방앗간의 옆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새것으로 반짝거렸을 자주색 양철판이 세월에 빛바래고 녹슬어가고 있었다. 비가 새면 덧대고 또 덧된 흔적이 남아있는 오래된 벽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래되면 다 늙는구나, 싶어 건물을 보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빛바래고 녹슨 방앗간의 옆모습을 그렸다. 
 
▲ 동네 방앗간 어반 스케치 방앗간 앞 수돗가에서 들깨를 씻고 있는 주인 아저씨
ⓒ 임명옥
 
지난 몇 개월 동안 동네에 있는 방앗간들을 그리면서 나는 방앗간에 대한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장터와 골목과 대로변과 마을에 있는 방앗간을 그리면서 다양한 방앗간의 모습을 만나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듯 동네 방앗간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여러 방앗간을 어반스케치로 그리면서 올해 나는 추억과 노동, 관찰과 일상의 힘에 대해 배웠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보내고 다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한다. 오는 설날 아침, 가족들과 떡국을 먹기 위해 나는 곧 또 동네 방앗간에 갈 것이다. 편리하고 쾌적한 마트보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시간이 지나가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재래시장의 동네 방앗간에서 맛있고 푸짐한 떡국떡을 살 것이다.
 
▲ 동네 방앗간 옆모습 어반스케치 오래된 동네 방앗간의 빛바래고 녹슨 모습을 표현한 어반스케치
ⓒ 임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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