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가톨릭 신도라서…' 할복 거부해 웃음거리 된 고니시(上)
아들 잃은 이순신 "하룻밤 지내기가 한해 같다"
전투 중 적의 수급 베기 꺼린 이유는…
명나라에 절이도해전 조작해 보고한 진린
"11월 18일(이하 음력) 유시(저녁 6시)에 적선들이 남해로부터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공은 도독과 약속하고 이날 밤 10시쯤에 같이 출발해 새벽 2시쯤에 고냥에 이르러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 이날 밤 자정에 공은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이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때 문득 큰 별이 바닷속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이순신(1545∼1598)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 내용 일부다.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탈출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왜교성 앞에 복병 함대를 남겨 두고는 즉시 진린 함대와 함께 노량으로 향했다. 연합 함대 규모는 250여 척, 2만1000여 명. 함대는 진린의 본 함대를 중심으로 좌선봉에 등자룡 함대, 우선봉에는 이순신 함대로 편성됐다. 결전에 임하는 조선 수군의 전의는 비장했다. 지난해 칠천량에서 수중고혼이 된 병사들의 유족이며, 정유재란 때 코 베이고 목숨을 잃은 백성들의 가족이었다.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노량: 죽음의 바다'는 비장했던 순간을 조명한다. 전작 '명량(2014)'과 '한산: 용의 출현(2022)'을 잇는 이순신 3부작의 화룡점정이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의 양상을 바꿨다. 노량해전은 애초 전쟁의 양상을 바꿀 전투가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어차피 끝나게 돼 있었다. 노량해전은 침략전쟁에서 실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이순신이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길을 막고 벌인 전투다. 전투 규모만 따지면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보다 컸다. 임진왜란 역사를 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역사상 최대 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일본군은 명량에서 패배한 복수를 이순신 가족에게 대신했다.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그 과정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했다. 적의 한 부대를 상대해 적장 셋을 죽이고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은 나라를 보호하였지만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 셋째 아들 이면은 담력 있고 활을 잘 쏘는 등 무인적 기질이 다분했다. 이순신이 자기 뒤를 이을 무장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는 비통한 마음을 일기에 남겼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이순신은 1597년 9월 명량에서 승리한 뒤 서해를 타고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 작전상 후퇴였다. 병사들이 지쳤고, 화약과 염초도 다시 확보해야 했다. 명량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선발대 133척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은 여전히 수백 척의 함대가 건재했다. 일본군은 이순신을 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본 수군에게 있어 명량에서의 패배는 너무 큰 충격으로 남았고, 이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은 스스로 수륙병진 작전을 포기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영산강 하구 고하도로 남하했다. 108일간 머무르며 판옥선 약 마흔 척을 건조하는 등 군세를 정비했다. 그 뒤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자리를 잡으니 1598년 2월의 일이었다.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있어서 아주 편리하므로 공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짓게 하고 거기서 군량을 공급받았다. 그리하여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져서 남도 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열 배나 더하였다(이충무공행록)."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또 해로 통행첩을 발행하고 염전을 운영하며 군량미를 확보했다. 당시 고금도에 4만여 호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한 집에 5인 가족이 살았다 치면 이순신에게 의지해 사는 백성이 20만 명도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역사 전문가 황현필 씨는 "아마 섬이었던 고금도에 20만 명이나 거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근처의 약산도와 신지도, 그리고 해안가의 강진과 해남, 진도까지 이순신의 행정력이 미쳤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고금도에서 조선 수군은 완전히 다시 일어났다. 군세는 한산도 시절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가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는 요충지였다면, 정유재란 당시에는 남해의 서쪽 끝인 고금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진린은 1598년 5월 선조에게 "조선의 장수 중에 군율을 어긴 자가 있으면 내 혼쭐을 내겠소이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상국의 장수라지만 일개 장수가 일국의 왕 앞에서 하기에는 건방진 소리였다. 왠지 이순신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진린은 군량미 조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를 담당하는 조선 관리의 목에 밧줄을 묶은 채 말을 타고 끌고 다니기도 했다. 보다 못한 영의정 류성룡이 따졌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진린은 1598년 7월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사슴과 멧돼지 고기, 생선과 좋은 술을 내어 명나라 수군 5000여 명을 배불리 먹였다. 조선에 와서 제대로 대접받기는커녕 군량미 지급조차 되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차 있던 진린은 이순신과의 첫 대면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명나라 수군 5000여 명이 고금도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일본군 귀에 들어갔다.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뒤 몇 달 가까이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있던 그들은 고민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휘 체계는 아직 어수선할 터였다. 남의 나라 전쟁에 투입된 명나라 수군이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가졌는지, 싸울 의지가 확실히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였을까. 명량 뒤 도망만 다니던 그들이 느닷없이 고금도를 기습했다.
*옥포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혼쭐났던 일본 해군 총사령관 격인 도도 다카토라와 안골포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던 가토 요시아키가 무려 100여 척의 함대와 병력 1만6000여 명을 이끌고 고금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진린을 떠보았다. "제독, 어떻게 하시렵니까. 명군이 출정하겠습니까? 아니면 조선 수군과 함께 출정해 합을 맞춰보시겠습니까? 아니지, 먼 길을 오시느라 아직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번에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진린은 이순신의 단독 출정에 동의했다.
*이순신 특유의 병력 배치 묘수는 또 한 번 적중했다. 그는 미리 금당도까지 나아간 뒤 거금도를 끼고 공격해 올 수 있는 절이도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함대를 매복시켰다. 다음날 일본 함대는 절이도 안(북)쪽 바닷길로 공격해왔다. 방심한 그들이 소록도와 절이도 사이 좁은 바다로 빠져나오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조선 판옥선들이 일본 함선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함포를 발사했다. 매복에 걸린 일본군은 당황하면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살아서 돌아가는 배가 절반이었고 격침돼 바다에 빠지는 배가 절반이었다. 소록도 앞바다에는 살기 위해 육지로 헤엄치는 일본군들이 물고기 떼만큼 많았고, 이들이 간신히 소록도 등의 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지쳐 망둑어처럼 갯벌을 기어갈 뿐이었다. 아무리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칼을 들 힘조차 없었다. 섬에 상륙한 조선군에게 쉽게 목이 잘렸다.
*이순신은 전투 중에 적의 수급(首級·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 베기를 꺼렸다. 그것 때문에 한 척의 왜선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지론이 있었다. 그랬던 이순신이 유독 절이도해전에서는 부지런히 수급을 챙겼다.
*금당도에서 조선군의 전투를 지켜본 진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구경만 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함께 출정하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그런 진린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순신은 절이도해전에서 얻은 수급 마흔 개를 선물로 줬다.
*절이도해전은 일본 전함 약 쉰 척이 수장되고 일본군 수천 명이 전사한 역사적 승리였다. 규모만 놓고 보면 한산도대첩이나 명량대첩에 뒤지지 않는 성과였다.
*이순신은 두 종류의 장계를 올렸다. 하나는 '조선 수군의 단독 참전이었지만 진린이 공을 시샘해 안타까워하기에 우리 군이 거둔 수급 가운데 마흔 개를 건넸다', 다른 하나는 '진린이 열심히 싸운 끝에 왜선을 침몰시키고 수급을 얻었다'였다. 번득이는 기지였다. 수급을 선물로 받은 진린은 명나라 본국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절이도해전에서 싸운 것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급기야 명나라 감찰관이 사실 여부를 조사하러 조선에 들어왔다. 거짓 보고가 들통나면 진린은 명나라로 압송돼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두 가지 장계 가운데 후자를 명나라 감찰관에게 보여줬다.
*이순신은 진린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에게 판옥선을 한 척씩 선물했다. 당시 명나라 수군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수준이었다. 해금(먼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함) 정책으로 바닷길이 막히면서 해군력의 성장이 멈춰버렸다. 실제로 주력선인 사선과 호선은 일본의 안택선이나 세키부네만도 못했다. 안택선과 세키부네는 빠르다는 강점만큼은 분명했다. 사선과 호선은 한 공간에서 포를 쏘고 노를 저어야 했기에 함포 위력이 약했으며 빠르지도 않았다. 최대 승선 인원도 여든 명에 그쳤다. 판옥선의 200명과 대조됐다.
*진린은 선물을 받고는 이순신을 자신과 대등한 전장의 동료이자 전우로 인정했다. 함께 행차할 시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의 그것을 앞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는 이순신을 '이야'나 '노야'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야'는 '어르신'이라는 의미로 완전한 존칭이었다.
*진린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낼 공이 있다." 선조는 글을 읽고 자기 장수를 치하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순신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가신들 가운데 믿을 만한 다이묘들과 그들의 군대를 조선에 보냈다. 승리하면 정복한 조선 땅을 영지로 나눠줘 그들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쟁은 길어졌고 측근 다이묘들은 엄청난 병력을 잃었다. 반면 조선에 원정군을 투입하지 않은 에도의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1536년 농부이자 말단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발탁돼 이례적 승진을 거듭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자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 손자를 옹립하면서 실권을 잡았다. 158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전투를 벌인 뒤 화친을 맺었고, 1585년에는 시코쿠, 1587년에는 규슈, 1590년에는 간토를 정복해서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일했다. 관백직과 도요토미 성씨를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카 이데쓰구에게 관백직을 물려주고 다이코가 됐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도요토미는 불안했다.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도요토미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몸이여,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가나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도요토미의 임종을 지켰던 이시다와 도쿠가와는 조선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죽음을 감췄다. 도요토미 글씨로 명령서를 위조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일본군에 대한 철병 명령을 내렸다.
*가토 기요마사는 1562년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동향 출신인 도요토미를 보필했다. 1583년 시즈가다케 전투에서 활약해 명성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제2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경쟁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갈등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참가했다. 승전의 대가로 구마모토 번을 받아 구마모토성을 쌓았다. 지금도 성 주변에는 울산 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에 충성하는 대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안전을 지키는 전략을 취했다. 가토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함경도 방면까지 침략하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전세가 역전되면서 경상도 해안으로 후퇴해 서생포 왜성을 짓고 주둔했다. 1594년 무렵의 강화교섭 시기에는 직접 교섭에 나서 사명대사와 여러 차례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외 무역항으로 번성한 오사카의 사카이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가톨릭에 입교해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히데요시 정권의 재정을 맡아 총애를 얻었으나 무사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멸시받았다. 1600년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서군에 가담했다가 패해 처형당했다. 그는 가톨릭 신도라서 할복이라는 형식으로 자살하기를 거부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무사의 미덕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에도 시대에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가톨릭 다이묘의 사망을 기리어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명량에서 패하고 직산에서 명군에게 막혀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한 일본군은 왜성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선 정벌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왜성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철병 명령은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도요토미의 죽음은 완벽한 비밀로 지켜지지 못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조선에 남은 일본군 사이에 소문이 돌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병력은 10만 명에 육박했다. 조선도 3만 명 정도의 정예군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합해 남해안에 있는 왜성 약 스무 곳을 공격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위협적인 대상은 가토가 지킨 울산왜성, 시마즈가 버틴 사천왜성, 고니시가 있는 순천왜성이었다. 명나라 경리 양호와 병부상서 형개는 병력 13만 명을 네 개로 쪼개어 일시에 세 곳을 공격하기로 했다. 울산왜성은 명나라 장수 마귀가 조선의 선거이, 김응서와 손을 잡고 공격했다. 가토는 자결 직전까지 몰리며 고전했지만 끝내 수성했다. 사천왜성은 명나라의 동일원과 조선의 정기룡이 함께 공격했으나 시마즈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고니시가 지킨 순천왜성은 명나라 장수 유정과 조선의 권율이 육지, 진린과 이순신이 바다에서 각각 공격하기로 했다. 고니시는 조선 침략군의 총사령관이자 선봉장이었다.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해 부산성전투, 동래성전투, 탄금대전투, 한양 점령, 그리고 평양까지 점령해 조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조선 조정은 순천왜성만큼은 꼭 점령해 그의 목을 취하고 싶었다. 문제는 명나라 장수 유정의 태도였다.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병력을 손실하기 싫었는지 공격을 앞두고 고니시에게 슬그머니 휴전 회담을 제안했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건 고니시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직접 만나 회담하고자 했다. 고니시는 함정일 수 있다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정을 만나러 성을 나섰다. 그런데 이것은 유정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고니시가 오는 길목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하지만 총기 오발 사고로 작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계략에 실패한 유정은 권율과 함께 순천왜성 공격에 나섰다.
*성 둘레가 1㎞ 남짓한 사천왜성은 바닷가가 인접한 해발 30m의 나지막한 구릉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동쪽을 제외한 3면이 바다와 접한 구조였다. 육지와 연접한 동쪽의 성벽 밑으로는 해자를 설치했다. 지금은 남쪽과 북쪽 바다가 매립돼버려 원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인들에게 이 성은 매우 각별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이 당시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천수각 터에 '사천신채전첩지비'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 1945년 광복 직후 이 지역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 없애버렸다.
참고 자료 : 황현필 지음·발행처 역바연 '이순신의 바다(2021)', 류성룡 지음·이민수 번역·발행처 을유문화사 '징비록(2014)', 이순신 지음·노승석 번역·발행처 여해 '쉽게 보는 난중일기(2022)', 이순신역사연구회 지음·발행처 비봉출판사 '이순신과 임진왜란 4(2006)', 안영배 지음·박영철 사진·발행처 동아일보사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018)',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지음·김해경 번역·발행처 가갸날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2019)', 김시덕 지음·발행처 학고재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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