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하노이·방콕 이어 "北평양에 사무소 내겠다"는 中로펌, 왜 [글로벌 리포트]
중국의 대형 법률사무소(로펌)들이 최근 몇 년 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 거점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내년 중 북한 평양에 사무소를 내겠다”고 공언한 로펌까지 등장했다.
중국의 경기 침체 장기화와 인건비 상승에 해외 진출을 서두르는 중국 기업들, 중국 당국의 규제 강화가 불안한 중국 진출 외국 기업들의 법률 서비스 수요가 동시에 늘었기 때문이다.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거세진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중국 경제의 본격적인 아시아 진출을 반영하는 현상이란 평가와 함께 한국 등 아시아 국가가 미국 등의 대중 제재 회피를 위한 우회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하노이·방콕에 잇달아 사무소 개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에 따르면 중국 로펌의 해외 진출은 지난 5년간 급증세다. 2018년 말 120여개였던 중국 로펌의 해외 사무소 수는 지난해 말엔 180여개로 50%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의 사무소 증설이 두드러진다. 중국 최대 로펌인 잉커(盈科)는 지난 7월 태국 방콕에 첫 동남아시아 지역 독자 사무소를 개설한 데 이어, 지난 10월엔 베트남 하노이에 지점을 열었다. 대형 로펌인 한쿤(漢坤)과 더헝(德恒)도 올해 들어 각각 싱가포르와 라오스 비엔티안에 첫 사무소를 열었다.
중국 로펌의 한국 진출도 부쩍 늘었다. 2018년 리팡(立方)을 시작으로 잉커(2020년), 더헝(지난 4월), 중청칭타이(衆成淸泰, 지난 7월)가 잇달아 서울에 사무소를 냈다. 중국 로펌은 한국 대형 로펌과 제휴해 주로 지식재산권(IP) 소송, 인수·합병(M&A) 등에 대한 법률 지원 및 컨설팅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다만 아직까지 대규모 투자 등의 움직임은 드러나지 않았다. 박종찬 미래에셋자산운용 법무실장은 “아직은 중국 로펌이 주도하는 의미 있는 M&A를 보기 힘들다”며 “현재는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보고 거점을 준비하는 단계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 입장에선 북한도 매력적"
북한처럼 리스크가 큰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로펌도 있다. 6000여명의 변호사를 거느린 중국 4대 로펌 징스(京師)는 내년에 서울, 도쿄와 함께 평양에 사무소를 열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중국 로펌(더헝)이 평양(2018년 10월)과 중국 주요 도시(2019년 4월)에서 주최한 세미나에 북한 대외경제성 산하 기관 소속 법률가들이 참석해 투자 유치 활동을 한 적은 있지만, 북한에 직접 진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징스 측은 “북한 지사는 중국 투자자들에게 기업 M&A, 에너지 사업, 녹색 분야 투자 등에 대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며 “북한의 외국인 직접투자법과 규정, 노동력 수출 등에 대해서도 자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脫) 코로나’ 이후 북·중 간 교역이 점차 정상화되면서 중국 측의 대북 투자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감에서 이 같은 행보에 나섰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전문가 사이에선 “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대북 투자는 늘 불안정하지만, 인건비 및 광물 등 각종 자원 가격 상승으로 고전하는 중국 기업가 입장에선 매력적인 투자처”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철수 러시, 해외 진출 자극
중국 로펌이 이처럼 전방위 해외 진출에 나선 것은 일차적으론 대내외적 상황이 그만큼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 내 변호사 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에 반해 일감이 크게 줄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떠나려는 외국계 기업의 ‘손절’ 러시가 중국 로펌의 목을 더 조이고 있다. 광둥성 선전이 거점인 광둥줘젠(廣東卓建)이 지난달 처음으로 도쿄에 해외 사무소를 개설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둥줘젠 도쿄 사무소의 윤수종 변호사(조선족)는 닛케이와 인터뷰에서 “(최근 중국에서) 자동차산업 관련 일본 기업의 철수 안건이 늘고 있다”며 “안건이 끝나면 (중국 내) 고객이 하나 없어지는 셈이어서 마음이 복잡하다”고 말했다. 결국 “해외에서 새로운 수요를 개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란 얘기다.
이 때문에 중국 로펌은 중국 기업의 투자가 활발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아시아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중국의 해외직접투자액은 전년 대비 8.8%나 감소했는데, 아시아 지역 투자액만큼은 줄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방 로펌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점도 중국 로펌에게는 기회 요소다. 이 때문에 “글로벌 자금의 흐름을 따라 확장하는 로펌의 특성상, 향후 3~5년간 중국 로펌의 아시아 진출이 더욱 가속할 것”(류스다 홍콩대 법학과 교수)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 제재망 뚫기 위해 한국 우회"
이와 반대로 서방 로펌의 중국 사무소는 축소 일로다. 중국 사법부에 따르면 중국 본토의 외국계 로펌 수는 240여개(2017년 말)에서 5년 연속 감소세로 205개(지난해 말)까지 쪼그라들었다. 중국 기업의 확장성을 나타내는 '해외 증시 상장' 수요가 급감한 데다, 서방 기업의 중국 진출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고전이 역력하다. 지난해 모바일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인 디디추싱(滴滴出行)이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상장 폐지된 게 대표적이다. 미국 당국이 디디추싱이 수집한 주행 데이터 등을 중국 정부가 악용할 수 있다며 규제를 강화한 게 발단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게 중국 로펌의 최대 고민이다.
이런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한국이 우회로로 이용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계 투자사 관계자는 “해가 갈수록 미국의 대중국 견제가 강화되면서 지리적으로 가깝고 미국의 우방인 한국을 교두보로 삼으려는 중국계 자본이 적지 않다”며 “일종의 우회로를 뚫는 과정에서 중국 로펌이 활약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요컨대 한국이 중국 자본의 대서방 투자를 위한 세탁 창구가 될 수 있단 설명이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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