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관료 사회의 겨울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무소불위였다. 서울의 봄은 그들에게 짓밟혔다. 그들은 시행 4년째인 부가가치세도 폐지하려고 했다. 국민 반대를 무시하고 도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부가가치세 강행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원인이 됐다는 왜곡이 배후에 있었다. 부가가치세 도입 실무작업을 했던 재무부 강만수(이명박 정부 때 기획재정부 장관 역임) 과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불려가 폐지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육성과 자주국방 재원 조달을 위해 부가가치세가 도입됐다는 점, 폐지하면 국방비 규모의 세입이 없어진다는 점, 탈세가 어려운 공평한 세금이라는 점 등이었다.
부가가치세는 한국을 만성 재정적자에서 벗어나게 해 준 효자 세목이다. 시행 초기엔 국세의 30%가 넘었고, 지금도 약 20%를 차지한다. 그런 세금을 덜컥 폐지하려 한 신군부의 위세는 지금 돌아봐도 놀랍다. 그러나 그들은 부가가치세를 폐지하지 못했다. 부가가치세가 10·26의 원인도 아니었고, 그만한 세수를 대체할 세금을 새로 만들 수도 없었다. 당시 많은 공무원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정화’ 대상으로 몰렸다. 하지만 공직 사회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꺾지는 못했다. 한강의 기적은 그들의 헌신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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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임 석달 안된 장관 총선에 징발
공매도 금지, 주식 부자 감세 등
총선 포퓰리즘에 관가 사기 저하
」
공무원이 예전처럼 뛰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됐다. 그러나 공직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정치권 아닌가. 지시는 정권이 내리고 책임은 공무원이 지는 악습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엔 정치의 ‘경제 징발’이 부쩍 잦다. 사람도, 정책도 총선용으로 일단 갖다 쓰고 보자는 식의 사안이 잇따르고 있다.
산업과 통상,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인사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미·중 경제패권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격변 와중에 취임한 방문규 장관은 취임 석 달도 안 돼 교체됐다. 그는 내년 4월 총선 때 수원 지역에 투입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총선은 중요하다. 승리해 다수당이 돼야 입법도 수월해진다. 그러나 선거에서 어떻게 이기느냐도 중요하다. 장관 공백과 부처 혼란은 별문제가 아닌가.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 차출에 대해 “요새 정치 분야가 우리나라 두뇌 역할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가 전체로 봐서는 크게 대미지라 할 건 없다”고 했다. 그런 논리가 바로 ‘정치 만능주의’ 발상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경제부처가 오랫동안 공언해 온 원칙까지 허물게 하고 있다. 공매도 전면금지만 해도 금융당국 수뇌부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공매도 완전재개를 해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말해 온 것을 뒤집은 조치였다. 공매도가 막히면 주가 거품과 주가 조작을 억제하는 시장 기능이 위축된다.
주식 양도세 부과 대상인 대주주 기준 완화도 그렇다. 땀 흘려 일한 근로소득엔 세금을 물리면서 주식 거래로 번 돈엔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이 정상인가. 조세 정의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보·보수 정권 할 것 없이 양도세 대상을 계속 넓혀 왔다. 과세 대상을 좁히면 주식 부자가 이득을 본다. 그들이 주식을 던져 개미 투자자가 피해를 본다지만, 그들은 연초엔 다시 주식을 사들인다. 세금회피용 매도 때문에 주가가 출렁인다고 세금을 면해 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런 ‘상식적 타당성’ 때문에 재정당국은 양도세 대상 축소에 소극적이었다. 떠나는 추경호 부총리마저 끝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버텼다. 두 조치 모두 주가 부양을 위한 선거용 포퓰리즘일 뿐이다.
정권이 공직자들의 소신을 뭉개면서 복지부동을 문제삼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지금도 관가에선 부가가치세 시행을 앞두고 반대 여론이 들끓었을 당시 박 대통령이 김용환 재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이 회자된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시오.”
그런 시절은 이제 전설이 된 것일까. 관료 사회가 유달리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 한국 경제도 그렇다.
글 =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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