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연하 아들 친구와 결혼한 수잔 발라동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3. 12. 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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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화가의 기묘한 동거

에릭 사티와 툴루즈 로트레크의 연인이자, 르누아르와 드가의 모델로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여성 화가가 있다.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무도회’, 로트레크와 드가의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이다.

발라동은 모델 출신 화가라는 꼬리표를 넘어, 근대 여성 화가 중 가장 유명했던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와 비교되는 유일한 존재다. 모리조와 카사트는 명문가 자제로 각각 당대의 대가인 마네와 드가와의 친분으로 강력한 후광을 입었다. 소위 성공한 남자들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수잔 발라동의 작품은 예술적인 면에서 훨씬 더 독창적인 세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덜 주목받았다. 예술의 진면목이 출신 성분과 사생활에 가려져 확실히 저평가됐던 것. 발라동에게는 예컨대 비천한 신분, 사생아, 미혼모, 서커스 무희, 모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다녔다.

수잔 발라동은 1865년 프랑스 남서부 리무쟁에서 가장 밑바닥 직업 중 하나였던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청소부, 직공, 양재사, 카페 종업원 등 온갖 궂은일을 경험했다. 주의력 결핍 성향을 보이는 등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와 서커스단 무희가 됐다. 그렇지만 공중곡예를 하다 추락해 부상을 입는다.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게 되자 손쉬운 모델 일을 시작한다. 약간 사시지만 작고 아름다운 몸매를 지녔던 16세의 발라동은 당대 유명 화가였던 늙은 퓌뷔 드 샤반의 모델이 됐고, 이후 르누아르에게 발탁된다.

그런 발라동이 18세의 겨울, 사생아를 낳는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라는 직업은 매춘부나 다름없었으니, 그녀 또한 생부를 가늠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사생아 아들은 훗날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년)다.

발라동은 화가들의 작업실에 드나들면서 틈틈이 소묘를 했고 샤반과 르누아르에게 보여줬지만, 이 늙은 화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단박에 무시했다. 모델 출신이 언감생심 자기네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러나 가장 먼저 발라동의 소묘를 보고 재능을 간파한 로트레크는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드가에게 소개한다. 누구보다 까칠했던 드가는 “너도 우리 중 하나가 되겠구나!”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는 발라동의 삶에 비수처럼 꽂힌 ‘신의 격려’와도 같은 메시지가 됐다. 그렇게 드가의 모델이자 문하생이 됨으로써 체계적인 미술 사교육을 받게 됐다.

발라동은 로트레크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의 거절로 결별했다. 그러다 28세에 당시 무명 피아니스트였던 에릭 사티와 사랑에 빠져 6개월간 동거한다. 사티가 발라동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떠올려 더 이상 섹스를 나눌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자살 소동을 벌이고 관계를 끝장낸다. 동거하는 동안 발라동은 사티를 위해 최초로 유화 초상화를 그려줬고, 사티는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었는데 ‘난 널 원해’라는 샹송이 그것이다. 사티 사후 그가 발라동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남겨진 유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발라동의 초상화, 부치지 못한 편지, 추억이 담긴 사진 등….

31세에 발라동은 사티의 친구였던 은행가 폴 무시스와 결혼한다. 폴은 발라동에게 단번에 매혹돼 곧장 청혼했지만, 8년의 기다림 끝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무시스와의 결혼은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해 경제적 안정을 찾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 결혼은 13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여러 스캔들에도 관대했던 무시스가 아내의 불륜을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 바로 44세의 발라동이 아들 친구인 21살 연하남 앙드레 우터와 사랑에 빠진 일이다. 심지어 아들보다 세 살 어렸던 우터는 당시 막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젊은 청년으로 낮에는 변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당시 두 사람 사이 관계를 그린 작품이 ‘아담과 이브(1909년)’다. 아담은 거침없이 선악과를 따려는 여자를 은근슬쩍 저지하는 듯하다. 이브는 당당하고 아담은 눈치를 보는 듯 왠지 겸연쩍다. 또한 남자의 치부는 가려져 있고, 이브는 음모를 드러내고 있다. 발라동은 이 그림을 통해 세상이 우터와의 만남에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더 이상 세상의 규범 따윈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우의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무렵의 수잔 발라동.
작품만큼 유명했던 ‘연애 편력’

1914년 발라동과 우터는 마침내 결혼해 정식 부부가 됐다. 발라동은 49세, 우터는 28세, 아들 위트릴로의 나이 31세였다. 몽마르트르에서 한 지붕 세 화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당대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저주받은 삼위일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상 이 관계는 매우 파격적인 만큼 녹록지 않은 행보였다. 유년 시절 위트릴로는 주로 조모에게서 양육됐던 까닭에 늘 애정에 목말라했다. 평생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위트릴로는 또다시 엄마의 사랑을 친구에게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고, 남편 우터는 아내의 관심을 친구이자 의붓아들과 나눠야 했을 테니 또 결핍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삼각관계 속에서 발라동은 기묘한 줄타기를 하며 그 긴장감을 예술의 역동으로 승화시켰을지도 모른다. 동거할 당시 그린 ‘가족과 함께 있는 자화상(1912년)’은 당시 그들의 동상이몽 관계를 잘 보여준다. 각자 다른 곳을 향한 시선 속에도 그녀만큼은 화면을 직시하고 있다. 마치 심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는 듯 의연하게! 결국 발라동과 우터의 결혼생활은 화가와 딜러라는 관계로 타협됐고, 둘은 12년 후 헤어졌지만 얼마간 우정에 근간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작품보다 사생활로 주목받았던 수잔 발라동 예술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그녀가 뭇 남성들을 매료했던 방식과 작품은 상통한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림이 취미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런 발라동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작이 ‘푸른 방(1923년)’이다. 이 그림은 미술사의 전통적인 주제인 비너스, 올랭피아, 오달리스크의 발라동식 버전이다. 화면 속 발라동은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육감적이지도, 멋진 옷을 입지도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를 전혀 의식하지도 않으며, 담배를 꼬나문 것이 여장부다운 품새다. 왼편에 놓인 책은 그녀가 추구하는 ‘지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아무 데나 간다.”

-매 웨스트-

(1)가족과 함께 있는 자화상, 1912년, 각자의 시선을 가진 인물 속에서도 발라동만이 화면을 직시하고 있다. (2)아담과 이브, 캔버스에 유채, 162×131㎝, 1909년, 21살 연하의 연인 우터와 자신을 아담과 이브로 표현했다. (3)푸른 방, 캔버스에 유채, 90×116㎝, 1923년, 대표적 자화상으로 발라동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 있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0호 (2023.12.27~2023.12.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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