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뮤' 수현의 오열에서 위로받은 이유
[홍현진 기자]
▲ ‘다리꼬지마' 무대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
ⓒ 스브스 예능맛집 유튜브 |
'다리꼬지마' 무대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앳된 얼굴의 17살, 14살 남매가 쟁쟁한 뮤지션들과 낯선 관객들 앞에서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노래를 부르던 순간을. 평범한 10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남매는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관객을 들었다 놨다 했다. 2012년 < K팝스타 시즌2 > 방송 영상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진짜 무대를 가지고 논다.' 독보적인 매력을 가진 남매 듀오의 탄생이었다.
2019년 오빠 이찬혁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악동뮤지션은 '악뮤(AKMU)'로 이름을 바꾼다. 남매 모두 10대에서 20대가 됐으니 아이들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20대의 악뮤는 성숙하고('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2019년) 실험적인 곡('낙하', 2021년)을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악뮤의 이미지는 여전히 귀여움과 발랄함에 머물러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2014년 정식 데뷔곡인 '200%'. 이찬혁의 개성 있는 멜로디와 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이수현의 청량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복잡했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어지럽고 기운이 없을 때면 악뮤의 노래를 찾아들었다. 악뮤는 실패할 일 없는 치료제였다.
그래서 수현이 은퇴를 고민할 정도로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2021년 JTBC 예능 <독립 만세>에 출연한 수현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슬럼프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노래도 재미 없고 그저 쉬고 싶다고. 그 말을 하는 수현은 더 이상 단발 머리를 하고 '다리꼬지마'를 부르던 10대 소녀가 아니었다. 내가 나이 드는 것만 생각하느라 악뮤도 어른이 됐다는 걸 잊었다.
▲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악뮤, 최초 최연소-남매- TWO MC 악뮤(이찬혁, 이수현)가 8월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 아트홀에서 열린 KBS 2TV 뮤직 토크쇼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 이정민 |
마냥 밝고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수현을 다시 보게 된 콘텐츠가 있었다. 지난해 수현은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선 넘는 인터뷰'라는 영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무례한 질문을 위트 있지만 날카롭게 풀어냈다. 영상에서 수현은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1인 2역을 맡아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한다. 그중에는 '체중이 크게 왔다 갔다 하던데 왜 그런 거예요?'라는 질문도 있었다.
체중에 대한 이야기는 수현이 여성 연예인으로 살면서 수없이 들었을, 지금도 듣고 있는 질문이다. 여성 연예인은 끊임없이 겉모습을 평가받는다. 살이 찌면 찐 대로, 빠지면 빠진 대로 '건강이 걱정돼서 그렇다', '연예인이니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댓글이 어김없이 달린다. 마치 여성 연예인의 몸이 공공재라도 되는 듯이. 나이가 어릴수록 훈수는 더욱 심해진다.
선을 넘는 질문에 수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불친절하게 답한다.
"먹으니까 찌고, 안 먹으니까 빠지겠죠?"
현실이라면 '인성 논란'이 나올 법하지만 수현은 능청스러운 연기로 방송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솔직한 답변을 내놓는다. 속이 시원했다.
이 영상에서 수현은 폭식증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수현은 "배고프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조건 뭔가를 먹어야 되는 습관이 생겼다. 그게 저의 의지가 아니라 정신을 차려보면 제가 배 터지게 먹고 있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나서 이게 폭식증이라는 걸 알게 됐다"라면서 "최대한 큰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일을 줄이고 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지난 8월, 악뮤는 2년 만에 새로운 싱글 '러브 리(Love Lee)'로 컴백했다. '러브 리'는 악뮤의 초창기 곡인 '200%', 'Give Love'처럼 상큼하고 톡톡 튀는 노래다. 악뮤는 이번 앨범을 철저히 수현에게 맞춰서 만들었다고 밝혔다.
찬혁은 본인이 음악을 너무 어렵게 밀고 나가면서 수현에게 음악적인 고민이 많아졌던 것 같다며 자신도 수현의 슬럼프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수현은 오빠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힘든 시간을 극복 중이라고 했다. 사랑스러운 이씨 남매가 부른 '러브 리'는 음원차트에서 오랜 기간 1위를 차지하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질색팔색하는 찬혁과 수현의 '현실 남매 케미'도 많은 공감을 받았다.
'러브 리' 활동을 마치면서 수현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컴백을 준비하면서 걱정되고 두렵기도 했다고. 늘 밝게 웃으며 신나게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 주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또 들키고 싶지 않아서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고. 수현은 "제 시간은 오랫동안 안에서 고여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사람들이 악뮤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대중들과 함께 자라고 성장해가며 나이답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들을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노래하고 표현하는 것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이번 활동만큼은 너무 애써 아닌 척하지 말고 혹여 지금의 모습으로 아쉬운 말을 듣거나 미움을 받게 되어도 솔직한 지금의 나를 보여주자라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 지난 12월 22일 방영된 KBS2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마지막 방송 |
ⓒ KBS Kpop 유튜브 |
수현의 글을 읽으면서 아이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유는 2019년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디지털 음원 부문 대상을 수상한 후 고 샤이니 종현을 언급한다. 아이유는 "왜 그분이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고 또 저도 전혀 모르는 감정은 아닌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슬프고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기쁠 때 기쁘고 슬플 때 울고 배고프면 힘없고 아프면 능률 떨어지고 그런 자연스러운 일들이 자연스럽게 내색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특히 저희 아티스트 분들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니만큼 프로 의식도 좋고 다 좋지만 사람으로서 먼저 스스로 돌보고 다독이고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병들고 아파하시는 일이 없었으면, 진심으로 없었으면,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종현과 수현의 목소리에 빚을 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수현이 '이제 다 극복했어, 다 괜찮아졌어'가 아니라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줘서 좋았다. 아이유의 말처럼 아티스트들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늘 신나고 밝은 모습, 완벽한 모습만 보여줘야 할 의무는 없다.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연예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대중들은 종종 잊는다.
3년 동안 흐르지 않던 시간을 보냈다는 수현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악뮤는 심야 음악 프로그램인 KBS2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MC를 맡고, 4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고 전국 투어를 하고 있다.
걱정과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수현에게 선을 넘은 무례한 말을 쏟아내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무책임한 말들이 난무한다. 수현은 그런 말에 잠식되는 대신 자신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응원을 보내주는 이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수현은 인스타에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저를 딸처럼, 조카처럼, 언니처럼 그리고 동생처럼 아껴주신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싶을 정도로 과분한 격려와 위로를 받았고,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고 썼다.
지난 12월 22일 방영된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마지막 방송에서 수현은 고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부르면서 오열했다. 수현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울어본다고 했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라는 가사를 부르다 수현은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고 무대 아래에 있던 찬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현 대신 노래를 불렀다.
'그대여, 힘이 되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불안정한 음색, 떨리는 목소리로 수현은 끝까지 노래를 이어갔다. 영상을 보면서 그 어떤 악뮤의 노래보다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누구에게나 이리로 가야 할지 저리로 가야 할지 아득한 시간이 찾아온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 같고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가혹해지는 순간이. 행복과 불행, 불안과 평온은 비포장 도로처럼 수시로 교차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수현이 자신의 주제곡이라고 말한 '후라이의 꿈' 가사처럼 때로는 흘러가고, 눌러붙고, 굴러가면서. 수현에게 말해주고 싶다.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한 발, 한 발 용기 있게 통과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지금 수현이 걷는 길이 누군가의 길을 밝혀줄 거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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