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듯한 다리 통증에도 '불인정'... "마음에 대못 박아"

이고은 2023. 12. 3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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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안 되는 장애인등록제 ②] 허울뿐인 장애범주 확대

[이고은, 유하영, 김지수 기자]

▲ 7월 19일 취재팀이 방문한 강병진씨의 자택 옆에는 강씨가 늘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가 놓여있다.
ⓒ 이고은
    
"매일 죽을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 번 장애인정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습니다."

10년째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를 앓고 있는 강병진(31)씨는 매일 다리가 불타고 칼로 베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CRPS는 외상이나 수술 후 신체 일부분에 극심한 통증이 생기고 손상 부위를 넘어 다른 부위까지 통증이 번져나가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군대에서 사고로 발목을 다친 후 방치된 강씨가 뒤늦게 입원했을 때는 이미 통증이 다리에 퍼진 상태였다.

CRPS 발병 후 그의 세상은 작은 방 안에 갇혔다. 발을 땅에 내딛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통증이 동반되기에 병원 방문을 제외한 외출은 손에 꼽힌다. 병원에 갈 때도 누군가 동반한 채 휠체어나 목발에 의존해야 한다. 더군다나 초기에 오른쪽 다리에만 있던 통증이 현재는 왼쪽까지 전이돼 양쪽 다리 모두 통증이 있다.

통증 점수(VAS)에 따르면 그는 평상시 8점(통증으로 활동 제약이 있는 상태)에서 심할 때는 10점(최대한의 통증)의 통증을 느낀다. 통증으로 인해 수면 중에 몇 번씩 깨는 것은 물론 취재팀의 방문 당시 먹고 씻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도 힘들어 보였다. 강씨는 "하루하루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자살 시도도 했었고 다리를 절단하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다리를 잘라도 다른 신체 부위에 통증이 남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포기했어요"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그는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관절 운동범위가 90% 이상 감소돼야 한다는 관절구축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다. 2021년 시행령 개정으로 CRPS가 장애범주에 포함됐지만 강씨를 포함한 환자 대부분이 장애인정을 받지 못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의료계는 정부가 융통성 없는 장애등급판정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CRPS는 진단 후 2년 이상의 지속적인 치료에도 근위축·관절구축이 뚜렷한 경우 혹은 팔 또는 다리 전체에 마비가 있는 경우만 장애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는 CRPS로 인한 필연적 증상이 아니며 환자의 상당수가 통증 자체만 가지고 있다.

아주대병원 마취통증학과 최종범 교수는 7월 27일 취재진과 한 인터뷰에서 "충분한 논의 없이 장애인정기준이 만들어진 것이 문제"라며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한 환자들의 경우 통증과 관계없이 관절구축이 호전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장애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오죽 답답하면 환자들이 '재활 괜히 했다'는 말까지 한다"라고 전했다. 

한국 CRPS 환우회 이용우 회장은 해당 시행령이 구색만 갖춘 실효성 없는 개정이라고 말한다. 이 회장은 회장은 지난 7월 인터뷰에서 "CRPS가 장애인정 범주에 포함되기 전에는 그래도 (장애범주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행되니 크게 변한 게 없다"라며 "이건 완전 기대를 시켜놓고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이라고 토로했다. 

터무니없는 인정기준 앞에서 다시 한번 좌절
   
▲ 장애유형별 장애인 현황 질병별 장애인정률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 이고은
 
CRPS의 문제만은 아니다. 2021년 4월 오랜 호소 끝에 CRPS와 함께 장애범주에 포함된 여타 질병들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장애유형별 장애인 현황표에 따르면 2021년 시행령 개정 후 심사 결정을 받은 환자 수는 CRPS 335명·투렛 증후군 129명·기면증 33명에 불과하며 이 중 장애인정을 받은 환자 수는 각각 155명·95명·3명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환자 수와 비교하면 로또 당첨만큼 어렵게 느껴지는 수치로, 여타 질병들도 전체 환자 수 대비 극명하게 낮은 장애인정률을 보인다(위 표 참고).

병원에 다녀야만 장애로 인정 받을 수 있나요

올해로 47년째 투렛 증후군을 앓고 있는 박아무래(57)씨는 집에서조차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는 의지와 관계없이 불규칙적으로 소리를 내는 음성 틱과 신체 일부가 움직이는 행동 틱 모두를 가지고 있다. 틱으로 인한 소음 때문에 이웃집이 부동산을 상대로 소송을 한 적도 있어 박씨는 늘 불안해하며 살 수밖에 없다. 더 이상의 분란이 두려웠던 그는 무더위에도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집의 모든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지난 8월 전화 인터뷰에서 박씨는 "저 같은 음성 틱 환자들은 직장은커녕 단체 생활도 힘들어요.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만드는 건 진작 포기했어요"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박씨에게도 장애인정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다. 1989년부터 장애인정을 위해 노력해 온 그에게도 2021년 시행령 개정은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투렛 증후군의 경우 장애인정을 받기 위해 근 2년 이상의 치료기록·예일 틱 증상 평가 척도(YGTSS) 등에서의 일정 점수가 필요하며 3개월 이상 약물치료가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박씨의 경우 과거 15년 가까이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었지만 호전될 기미가 없었을뿐더러 불안증·호흡곤란·마비 등의 부작용으로 복용을 중단한 지 오래다. 그는 약을 끊고 오히려 상태가 좋아졌는데 장애 인정을 위해 다시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건 고역이라고 말했다.  
 
 7월 25일 취재팀과 인터뷰 중인 연세의대 정신과 송동호 명예교수
ⓒ 이고은
 
연세의대 정신과 송동호 명예교수는 투렛 증후군의 장애인등록 기준 중 장애인정 연령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는 "청소년 후기나 성인기에 투렛 환자의 60~80%가 틱 증상 호전을 보인다"라는 연구 결과를 들어 20세가 되어야 장애인정 심사를 받을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투렛은 보통 3~8세에 시작되며 초·중·고 시기 동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이 많다.

송동호 교수는 "12~15세의 경우 증상이 심해 등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라며 "한시적일지라도 특수교육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한국투렛병협회 김수연 회장 역시 "투렛 증후군이 심한 소아·청소년은 한시적으로 장애인정을 해주고 장애가 고착된다고 하는 시기인 20세에 다시 재판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라고 피력했다.

저는 정신장애가 아니라 기면증 환자입니다
 
 8월 6일 취재팀과 인터뷰 중인 주헌재씨
ⓒ 유하영
 
기면증 환자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기면증은 뇌의 시상하부에서 각성 유지에 중요한 신경세포(히포크레틴)의 감소로 초래되는 만성 뇌 질환으로 심한 주간졸림증·탈력발작·입면 시 환각·수면마비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주헌재(35)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탈력발작이 일어나 길에 몇 십분씩 쓰러져있는 게 일상이라고 말했다.

기면증이 장애범주에 추가된 후 장애인정을 받은 환자 수는 단 3명뿐이다. 주씨도 장애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이지만 현재 기준대로라면 더 이상 장애등록을 시도할 의향이 없다고 했다.

현재 기면증은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에만 장애로 인정된다. 그는 "왜 기면이 심하지 않아도 있을 수 있고, 기면이 심해도 없을 수 있는 정신과 기록을 필수 인정 조건으로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답답해했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정기영 교수는 기면증의 정신 증상 동반이 일반인보다는 흔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신 증상이 기면증의 주 증상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편 기면증으로 장애 인정을 받은 3명 중 한 명인 A씨는 '어떻게 장애인정을 받을 수 있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면서 "기면증은 신경계 질환이고 이로 인한 신경 증상을 주로 보이는 질환"이라며 신경과 전문의가 아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만 장애등급판정 자격이 있는 것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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