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멋∙글∙흥∙혼' 흘러넘쳐, 옛부터 여기가 '서울의 자궁'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의 새 명소 익선동
서울은 만원(滿員)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가 1969년, 인구 500만 명을 육박한 상황에서 그렇듯 비명을 질러댔다. 사람이 살 곳 아니라지만 사람이 살려고 서울로 모이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처럼 ‘서울불(不)서울’이다. 그러나 지금도 늘 익선동 주변을 도는 이른바 종3(종로3가) 세대가 우리 세대에 수두룩하다. 아직도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익선동 하면 늘 추웠던 기억이 흐른다. 사람을 떠나게 해도 돌아오게 하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힘을 느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야성을 이루는 포장마차길 따라 정처 없는 밤안개처럼 떠돌다, 뜨거운 불판 위에 갈빗살을 구워 먹으며, 한여름 밤을 하염없이 울다 떠나는 매미 같은 찰나의 신세지만 불퇴전의 기세로 떠들고 발광하다 헤어졌던 시절이 늘 맴돈다. 아직도 도가 부족한지, 변증법적 애증의 쌍곡선이 밤하늘 무지개처럼 뜬다.
박귀희·박초월 명창이 ‘안주인’ 역할
지금은 익선(益善)이지만 익선동은 본래 익동(翼洞)이다. 매미모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매미의 청렴을 본받아 선정(善政)하고자 한 조선의 해학도 있다. 꼴에 매미를 닮아 이슬만 먹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자기 집을 짓지도 않고, 때를 알아 허물을 벗고 물러나는 절도를 가진 매미의 오덕(五德)을 경계 삼고자 임금은 매미 날개를 위쪽으로, 신하들은 매미 날개를 아래로 하는 익선관을 나누어 썼다. 그러나 어디 그런 풍류의 삶을 모자 쓴다고 알 것이며, 어디 한 ‘놈’이라도 그런 ‘분’이 있었는지 구중궁궐에다 물어볼 일이다.
익선동을 만든 진짜 매미는 민족 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최초 부동산 개발업자인 정세권 선생이다. 현재 한옥마을로 지정된 익선동 165번지 일대는 본래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사저 ‘누동궁’ 자리였다. 철종도 익선동 출생이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익선관들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제 살길 찾아 간다. 당시 일본인들이 익선동 등 서울 사대문 안 곳곳에 침투하려 하자, 정세권 선생이 익선동 땅을 매입하여 작게 나눠서 20여 평 미만 규모의 작은 한옥들을 다닥다닥 지어 조선인들에게 분양했다. 익선동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정 선생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강력히 반발해 그 개발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람이었다. 모자 안 쓴 진짜 ‘익선관’이었다.
익선동은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인 종로에 중심을 틀고 있고 인근에 창덕궁, 북촌, 경복궁, 인사동, 종묘, 탑골공원 등 조선 500년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의 궁궐이 해체되자, 궁 밖으로 나온 궁녀들에 의해 궁중요리, 한복 등 다양한 궁중 문화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인 벽초 홍명희의 팔홍문집이 바로 익선동에 있었다. 그의 소설 『임꺽정』은 일제 때 살아 있는 우리말 사전이었다. 그리고 우리 소리 대가들로 이뤄진 조선성악연구회가 1937년 익선동 159번지에 들어선다.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이 입경(入京)하며, 천하 명인명창들의 소리가 익선동에 울려 퍼졌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를 일으켜 세우고 창극을 통해 해방 후 국악원을 통해 민족음악을 창출한 집단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이란 공간은 이들 명창 명인들의 보금자리가 됐으며, 종로 권번이나 한성과 한남 권번 인근 기생들을 불러 모았다. 특히 종로 권번 출신 기생들은 극장에서 조선 춤, 서양 춤, 노래, 조선 전통 가무극, 모더니티를 첨가한 호화찬란한 무용 등을 공연하면서 당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말하는 꽃’ 해어화(解語花)인 기생의 풍류로 조선의 음률과 선이 살아났다. 영화 ‘해어화’에서 기생에 대해 “사람과 말, 학문과 예술을 아는 말, 감히 꺾을 길 없는 고귀한 몸과 꽃이다. 재주란 그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기생이란 다름 아닌 예인이다”고 했다는데 맞는 말이다.
해방이 되고 서화가 김용진과 이병직이 살던 집은 훗날 요정 오진암(梧珍庵)이 된다. 1953년 오진암을 비롯, 대하, 명월, 청풍 등의 요정과 한정식집 송암(淞庵) 등이 익선동에 자리 잡았다. 익선동의 요정은 1970년대 초반에 들어 관광 요정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던 오진암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낸 곳이었고, 익선동 요정들이 경쟁하듯 서울시에 세금을 많이 냈으니 생산성 있는 동네였다. 오진암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에 북한 박성철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한 곳이다.
익선동에 우리 문화 운동 세력이 포진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한참 후 인근 건국빌딩으로 옮겼지만, 1980년 전후 민중문화운동을 아현동 애오개에서 열었고, 1990년도에는 버젓이 낙원상가 옆길 은성약국 끼고 익선동 안으로 쭉 들어오면 있던 4층짜리 건물에 드디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간을 마련했다. 그때 민족문학, 민족음악, 민족미술, 민족연희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밤이면 오늘날 종3의 포장마차처럼 각 장르 민족예술가들이 산개하며 게릴라처럼 알아서 술추렴을 하다 죽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다 돌아왔다.
그때 기억으로 익선동 한옥마을은 늘 우리들 고향 같았다. 고향 누이들이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조용한 촌이었다. 그리고 어느 소설가 형님이 술좌석에서 한 말, “이 곳 익선동은, 풍수적으로 서울의 중앙인데, 서울의 자궁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음기가 강한 곳이다. 반면 안정적이며 생산력이 강한 곳이다. 나중에 2000년 국립극장에서 남북교류를 열고 재일조총련 금강산가극단과 공동음악회를 한 후 이곳 크라운 호텔 인근에서 안기부의 보호 아래 밤새 판을 벌였는데, 익선동은 내게 그런 편한 곳이었다.
민족문학·민족음악·민족미술 다 모여
익선동에 바람이 불면 이곳에서 박귀희 선생을 기린다.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뻐 돌아간다’는 자서전 제목처럼, 어찌 보면 박귀희 여사가 익선동 안주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원래 뼈대가 있는 동네였어요”라며 덕성여대 교육관 앞에 선 판소리 고법 명인 정화영 선생은 “여기가 박귀희 선생님 집입니다. 그 집 현관이 여기에요. 예전부터 박귀희 선생님, 박초월 선생님(박초월은 해방 후 국악원 창극제전에 출연하며 경국지창으로 불렸다. 나라를 흔드는 소리였다) 이곳 집들을 우리가 세배 다니고 그랬어요. 원래 여기 전체에 집이 있었죠. 저 옆의 월드타워까지였죠.” 박귀희, 박초월 두 분이 이곳 익선동에서 언니 동생 하며 정겹게 살았다 한다.
그뿐이랴. 이 일대 국악인들의 연구소에 전수소가 즐비하여 국악촌을 이루었다. 묘하게 익선동 윗동네 운니동에 구(舊)왕궁 아악부와 운당여관이 상징적으로 존립했지만, 박귀희는 서울의 명소 운당여관도 팔고 익선동 삶의 공간도 모두 팔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이다. 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가 만든 여성국극 민족오페라 ‘햇님 달님’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모은 돈이 기반이었다. 국내 최초 남장 여인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고 임방울 명창을 비롯해 많은 명창들을 살렸지만 순풍에 돛달고 모든 것을 내어 놓은 뒤 갈길 바삐 돌아간 익선동 안주인의 삶에서 진정 익선관 매미의 날갯짓이 살아온 듯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복고풍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 ‘뉴트로’ 열풍이 불었고, 익선동 또한 을지로, 홍대 등과 함께 점차 뉴트로의 중심지로 돌아왔다. 이제 종로구 국악로에 국악특화도서관인 ‘우리소리도서관’이 개관하여 익선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골목마다 각각 다른 매력이 있고 맛집도 많아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변했다. 문화·엔터테인먼트 전문 온라인 매체 ‘타임아웃’이 선정한 ‘2021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29곳’에 종로3가가 3위에 올랐다. 익선동에 오덕(五德)을 지닌 매미들의 삶을 우리가 더 펼쳐나가자.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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