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떠난 뒤에도, 아플 땐 언제든 여기서 쉬었다 가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히니 기자]
▲ 쉼표 내부1 |
ⓒ 히니 |
SNS로 세월호참사 생존자의 근황을 종종 본다. 웃고 있는 사진이 많지만, 그날의 기억에 신음하는 글을 읽을 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큰 바위 하나가 마음에 툭 하고 얹어진다. 2014년 4월 16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이가 있는가 하면, 더디더라도 조금씩 나아가려 애쓰는 이가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익숙해진 채로, 그 옆을 묵묵히 지키는 누군가가 있다. 생존자들을 직접 대면하며 오랜 시간 소통하고 지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11월 23일, 경북 포항에서 4시간을 달려 경기 안산에 도착했다. 허름한 2층짜리 상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태권도장임을 알리는 시트지가 붙은 창문 옆 공간. 세월호참사 이후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머물렀던 '쉼표'였다. 가득 쌓인 서류와 책 너머로 미소 짓는 장성희씨가 있었다.
세월호참사 생존 학생들을 향한 마음
장성희씨는 자신이 '문화예술 기획자이자 신나는 문화학교라는 단체 상근자'라며 "지난 2015년부터는 '쉼표'를 지키고 있다"고 소개했다. 신나는 문화학교는 안산의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로 약 2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진 곳이다. 기존에는 예술인들의 안정적인 활동을 위한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지만,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뒤 내부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레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만들어진 것이 '쉼표'가 됐다.
"안산 면적이 되게 좁아요. 그만큼 인구 밀도는 높거든요. 그러니까 세월호참사 희생자 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 같았어요. 생존 학생 중에 지인의 자녀도 있었거든요."
막연히 '아는 사람도 저 배에 탄 것 아닐까'라고 걱정하던 성희씨는 얼마 후 평소 알던 선배의 딸이 단원고 생존 학생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만 건너면 아는 얼굴이 있는 곳이 안산이었다. 그곳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또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세월호참사를 마주한 성희씨와 신나는 문화학교 상근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고민했다.
누군가를 치유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대신 아이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생존 학생들의 생각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연락이 닿은 학생들에게 공간이 있으면 좋겠는지, 공간이 있으면 어떻게 꾸미면 좋겠는지 의견을 물었다. 안산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과 신나는 문화학교가 여러 논의를 거친 끝에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돈이 문제였다. 자금 마련을 고민하던 차에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어떤 분이 '쉼표'에 후원하겠다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후원을 하셨대요. 그래서 월세랑 프로그램 운영비는 몇 년간 지원받을 수 있었어요. 너무 감사했죠. 또 광주시민상주모임에서 1일 밥집으로 생긴 수익금을 전해주셔서 공간을 꾸밀 수 있었어요. 안산희망재단에서도 도움을 주셨고요."
'일단 해보자'라는 신나는 문화학교 활동가들의 결론을 구체화한 건 안산 시민들과 알음알음 후원의 손길을 보내온 이름 모를 사람들이었다. 세월호참사 생존 학생들을 위한 마음들은 자꾸 모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도움 덕에 쉼표는 2015년 10월 문을 열었다.
▲ 장성희씨 |
ⓒ 히니 |
세월호참사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은 75명이었다. 성희씨는 생존 학생들이 그들을 위한 공간에 삼삼오오 자주 올 거라 생각했다.
"저희가 처음에 아이들 상황을 잘 몰랐던 거에요. 어떤 아이는 반에서 혼자 생존한 경우도 있었거든요. 막연히 아이들끼리 친할 거로 생각했던 거죠. 그렇다고 뭘 묻기에도 조심스러웠어요. 이후에 3학년 때 몇몇 같은 반이 되고 하니까 몇 명씩 같이 오더라고요."
성희씨와 신나는 문화학교 상근자들은 예술 활동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학생들에게 몇 번의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존 학생들이 참여하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것들을 했다. 영화 보기나 게임, 떡볶이 만들어 먹기 같은 소소한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다행히 참여율은 생각보다 좋았고, 덕분에 '쉼표'라는 공간의 의미가 조금씩 채워졌다.
"앞에 바로 버스 정류장이 있고, 이 길을 주민들이 많이 지나다녀요. '쉼표'가 생존 학생들을 위한 곳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아는 상황에서 그 아이들이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생존 학생들에게 언제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만든 곳이 '쉼표'였다. 단지 편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쉼표'를 개관했던 때는 세월호참사에서 1년 6개월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세월호를 둘러싼 논란이나 가짜뉴스가 계속 확대 재생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쉼표'를 찾는 게 부담이었을 생존 학생들이 그저 고마웠다.
세월호참사 이후 시간이 흐른 만큼 안산을 떠나거나 시간이 흘러 직장이나 대학 때문에 안산에 살지 않는 학생도 있다. 고등학교 때만 '쉼표'를 이용한 학생도, 지금까지도 오는 학생도 있고, 아주 가끔 '쉼표'를 찾아오는 학생도 있다.
"애들이 지금은 성인이잖아요. 그래서 저녁에 만나면 여기서 자기들끼리 술도 한 잔씩 하고 그래요. 저희가 퇴근해도 도어락 비밀번호도 애들이 아니까 자유롭게 다녀가죠."
생존 학생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쉼표'의 낮이 비었다. 공간을 빈 채로 둘 수 없어 주민들에게 열어뒀다. 세월호참사 당시 내 일처럼 여기며 마음을 써주긴 했어도, 주민들에게 '쉼표'는 낯선 공간이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자 주민들도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생존 학생들의 공간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안산에 거주하는 모두와 공유하는 공간이 된 셈이다.
'안산 단원고 출신' 두려워하던 아이들
"(세월호참사 생존자) 아이들하고 친해지는 데 2~3년은 걸린 것 같아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들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느낌일 때도 있었죠. 매일 보는 사람이면 내일 사과하면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내일 안 오면 관계가 끝나는 거잖아요."
성희씨는 생존 학생들이 겪은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함께 이야기하는 건 고사하고 위로하는 것조차 가식처럼 느껴질까 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때를 기억했다. 그래서 '쉼표'를 지키다가 학생들이 오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쉬운 일처럼 보였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대학에 입학하면 자기소개를 하잖아요. 안산 단원고 출신이라고 하면 다 알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런 걸로 위축이 되니까 친구도 잘 못 사귀게 됐다고, 그래서 대학에 친구가 없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하더라고요."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지 곧 10년이다. '쉼표'가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 생존 학생들의 쉴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월호와 물리적 시간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동과 청소년, 시민들의 기억에서 세월호가 점점 지워지고 있을까 고민됐다. 처음부터 생존 학생들만 쉼표를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부터 생존 학생들의 고등학교 후배들까지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이 쉼표를 찾았다.
"한 해씩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지는 게 느껴져요. 청소년들도 예전만큼은 잘 안 오고요. 그러니까 이 공간도 점점 잊히는 것 같아요. 생존 학생들이 이용할 시기에 그 아이들이 안전하고 편하게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에 홍보하지 않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쉬운 것도 있지만, '쉼표'를 찾는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주려면 어쩔 수 없었죠."
▲ 쉼표 내부2 |
ⓒ 히니 |
여러 단체와 후원자들 덕분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월세나 운영비를 해결했지만, 언제나 예산은 모자랐다. 신나는 문화학교에 소속된 한 사람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일을 해야 했다.
"세월호참사 이후에 안산에 생겼던 민간단체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월세나 인건비, 운영비가 들어가니까 민간에서 운영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가랑이가 찢어져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청소년기에 경험한 친구의 죽음, 참사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데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생존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 트라우마를 감내해야 했다. 그래서 '쉼표'는 장기적인 목표나 비전, 그러니까 어떤 성과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의 어떤 순간을 기다려주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쉼표'를 둘러싼 현실은 달랐다.
"올해 생존 학생들이 초등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사업계획으로 만들었어요. 초등학생들도 다 선정해서 프로그램을 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정부에서 사업비를 못 준다고 하더라고요. 4년 전부터 매년 받던 지원이었는데, 갑자기 중단돼 많이 당황스럽고 아쉬웠죠. 그래서 올해는 사업계획만 하고 아무것도 못 했어요. 내년은 또 어떻게 하나 걱정이에요."
지자체나 국가 지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지원금과 후원금이 절실했다. 애초에 지원처도 많지 않았는데, 어렵게 찾은 지원마저 끊겼다. 당장 내년도 사업을 준비하려면 생존 학생들과 활동가들의 주머니를 여는 수밖에 없었다. 후원 계좌를 열어두는 건 어떠냐고 조심스레 묻자, 성희씨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분들께 후원받는 게 사실 조심스러워요. 불특정 다수에게 후원받게 되면 우리가 어떤 사업을 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요청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이 공간을 만든 취지와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애초에 성과를 내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던 데다 그런 과정을 동의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을 테니까요."
사실 '쉼표'의 프로그램은 특별한 성과를 보일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어떤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낼 수 없기에 후원자가 원하는 성과를 보여줄 수도 없다. 생존 학생들이 사업을 하기 위한 도구가 됐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성희씨는 "꼭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단체가 아니더라도 사회문제를 다루는 단체가 사라지는 게 그래서다"라고 부연했다. 결국 성희씨는 일을 위한 일을 해야 했다.
"힘들죠. 지난해까지만 해도 코로나19 때문에 일을 찾기 힘들었거든요. 그나마 올해부터는 좀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일을 많이 했어요. '쉼표' 지원도 다 끊긴 마당에 월세를 마련하자 싶어서 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쉬지 못하니까 문득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결국 스스로 '쉼표'를 지키자고 생각하더라고요."
▲ 개관식(상주시민모임-노란조끼)및 개관식 공연 |
ⓒ 장성희 |
생존 학생들은 어느덧 사회초년생이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전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1년에 한두 번은 꼭 '쉼표'에서 자리를 마련한다.
"이거 인터뷰라서 하는 말 아니에요. 저는 아이들이 '쉼표'에 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자주 만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아주 가끔 연락해 오는 아이들도 모두 건강하게 잘 극복하고 있는 거로 생각해요. 그 '쉼표'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안산 온마음센터, 학교, 부모님, 친구들의 도움도 다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아이들에게 너무 고맙죠."
성희씨는 바람도 있다. 생존 학생들이 언젠가 제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안산을 외면하고 싶은 아이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자란 곳, 나의 일부분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쉼표'가 아이들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으면 해요. 그리고 '쉼표'가 이 공간을 유지했을 때 우리 아이들이 이곳을 추억하고, 나중에 이곳에서 무언가를 할 거라고 확신해요."
쉼표 후원 문의 : 031-408-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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