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순간들...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작별인사'

장혜령 2023. 12.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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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장혜령 기자]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가 직접 선곡한 곡이 오로지 조명과 피아노, 마이크가 설치된 무대에서 흐른다. 흐른다고 표현했으나 담겼다는 표현이 가까웠다. 수많은 마이크가 피아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는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잡겠다는 집념처럼 보였다.

마치 나 혼자만을 위해 마련된 콘서트처럼 아름다운 체험의 영화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거쳐 전 세계 최초로 한국 돌비 애트모스로 개봉했다. 사운드 특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소성이 상당하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
ⓒ (주)엣나인필름
 
103분 동안 오직 흑백 화면 속에는 류이치 사카모토 뿐이다. 머리 위로 하얗게 눈 내린 연주자의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한 손으로 연주하면서 리듬 타는 한 손은 훌륭한 지휘봉이 되어 준다. 피아노는 손의 연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피아노와 혼연일체의 모습이다. 블랙과 화이트의 명암은 삶과 죽음으로 상징된다. 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늘 가까이 있기도 한 아이러니다. 3대의 4K 카메라는 깊은 주름, 점, 손가락의 혈관까지 거장의 일부를 찍는다. 영화의 조명과 촬영 방식은 '투병'과 '투혼'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2022년 9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에 걸쳐 촬영했으며 일본에 방영된 '온라인 피아노 콘서트'를 영화로 편집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 같은 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다. 다큐멘터리지만 공연 실황을 담은 듯한 독특한 인상이다. 올해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한 왕빙 감독의 <흑의인>이 오버랩된다. <흑의인>은 중국 체제에 저항했던 88세의 작곡가 왕시린의 피아노 연주와 퍼포먼스, 인터뷰를 담은 영화다.

직접 큐레이팅 한 20곡을 통해, 삶을 정리하고 전 세계인과 작별 인사를 했다. 직접 선곡, 편곡, 녹음, 연주 데이터의 기록 방법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스튜디오 NHK 509에서 촬영해 오직 연주에만 집중하도록 구성했다. 제목 '오퍼스(opus)'는 라틴어로 예술작품을 뜻하는 기호이며 20번째 연주곡의 제목이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암 투병 중이기 때문에 매우 야윈 모습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다양한 표정으로 울림을 전한다. 병이 악화되어 시한부를 선고받은 류이치 사카모토는 '한 번 더 납득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아이같이 천진한 표정, 카리스마 있게 집중하는 표정, 무아지경에 빠진 표정 등 다채로운 얼굴도 확인할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서 들리는 말소리라고는 시작 후 40여 분이 지나서다. 연주 중 실수하면서 몇 번을 고쳐 연주하다가 흘리는 말이다. 완벽에 완벽을 더하고 싶은 예술가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몰입을 위해 제목(자막) 없이 스트레이트로 연주 영상만 보여준다. 20곡의 리스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공개된다.

그는 "다시 합시다", "잠깐 쉬었다 하죠. 좀 힘드네. 지금 무척 애쓰고 있거든요" 등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릴 뿐이다. 올해 3월 작고했기에 말 한마디까지도 아련한 마음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전달되는 숙연한 시간이다. 소리라고는 피아노 연주와 힘겨운 숨소리밖에 없다. 간혹 매우 조용하므로 주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팝콘 먹는 소리가 엄청난 소음으로 둔갑한다.

한국과도 인연, 전방위적 예술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스틸
ⓒ (주)엣나인필름
 
류이치 사카모토는 1978년 < THOUSAND KNIVES >로 데뷔, 테크노 그룹 Yellow Magic Orchestra부터 팝, 오페라, 클래식, 올림픽 테마곡(바르셀로나), 연기 등 다방면으로 예술적 재능을 뽐냈다. 특히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서 요노이를 연기하며, 영화 음악 작곡가로 일했다.

이 작품은 제3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의 영광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1988)에서도 아마카스 역을 소화했다. <마지막 황제>는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고 골든글로브, 그래미어워드 등에서 음악상을 석권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브라이언 드 팔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이상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코고나다 등과 작업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은데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2017), <안녕, 티라노>(2019) 등에 참여했다. 유작이 된 <괴물>은 새로운 2곡을 포함, 새 앨범 < 12 >에 있는 곡, 'Aqua'의 편곡 등을 작업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대면하지 않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완성했다.

대중적으로는 작곡가, 뮤지션,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등으로 알려졌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운동가였다. 비핵화, 환경, 전쟁 등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가 좋았다면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 싱크>(2018)도 추천한다.

함께 본다면 예술과 삶에 대한 철학과 연주를 깊게 간직할 완벽한 2023년의 마무리가 될 것이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거장이 떠난 자리에 피아노 건반이 홀로 연주되는 장면과 연이은 문구로 먹먹함을 안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이름은 음악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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