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총명불여둔필, 괴테에서 염경엽까지

2023. 12. 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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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연세대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가르친 원로 학자. 그는 서예가이면서 서애(西厓) 류성룡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 송 교수가 옆 강의실에서 수업을 했음에도 그의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송 교수를 알게 되었고, 전업 작가가 된 이후로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만나는 관계로 발전했다.

한번은 서울 을지로 우래옥에서 있은 원로모임에 ‘천재 연구가’ 자격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송복 교수가 계셨다. 원로 모임에 가면 언제나 행복하다. 수첩에 메모가 가득해져서다. 식사 중에 내가 틈틈이 메모를 하니 송 교수가 칭찬하며 수첩을 달라고 했다. 그가 수첩에 글귀를 적어주었다.

총명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

쉽게 풀어쓰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서툴게 메모한 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 쯤이 되겠다.

염경엽 감독 [사진= 연합뉴스]

나는 메모를 조금 하는 편이다. 나는 메모 습관을 월간조선 기자 시절 조갑제 편집장에게서 배웠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메모를 한다. 그 메모는 반드시 한편의 글이 되거나 글 속의 여러 가지 사례의 하나로 녹여진다. 조갑제 대표는 내가 직접 경험한 최고의 메모광이다. 적어도 내가 몸담았던 신문사에서 그처럼 열심히, 한결같이 메모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천재 연구’를 하면서 여러 가지 공통점을 터득했다. 그중 하나가 그들이 메모광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뤄낸 업적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오랜 세월 축적된 메모의 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신간 서적을 잘 사지 않는다. 만일 꼭 사야 할 경우, 다면적으로 검토한 뒤에 구입한다. 오히려 읽었던 책을 한 번 더 펼쳐 보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읽어낸 책들은 지저분하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거나 읽다가 스친 생각의 편린들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려서다.

책등이 허옇게 변색된 책을 서가에서 꺼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이런 문단에 밑줄을 긋고 중요하다는 표시를 해두었구나.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그 순간만큼은 전두엽에 들어왔는데….

송복 교수가 2017년 1월에 필자의 수첩에 적어준 글귀. 총명불여둔필. [사진=조성관 작가]

고이 모셔둔 책에서 이런 순간을 겪을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 그러니 점점 신간을 사서 읽는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책을 읽으면 뭐 하나. 책장을 덮고 나면 새카맣게 잊어먹는 것을.

메모 수첩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수첩에는 지인들과의 대화 중에 얻은 지혜나 지식, 신문·영화·책·TV를 보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의 골자를 적어두었다. 그런데도 이 메모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수첩을 넘길 때마다 확인한다. 어찌 이럴 수가.

‘세계인문여행’이 햇수로 4년, 횟수로 210회를 훌쩍 넘겼다. 연재물의 분량은 20매 안팎이다. 연재가 장기화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글감 조달이다. 갈수록 압박감을 느낀다. 최소 서너 개를 예비해놓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

내가 아이디어를 채굴하는 방법은 메모장을 앞뒤로 계속 뒤적거리며 읽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종종 내가 이런 것까지 다 적어두었구나 하고 감탄할 때도 있다. ‘몇 글자의 메모’를 현재의 이슈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메모를 튀밥 기계에 생쌀을 넣고 굴리듯 계속 굴린다.(이럴 때는 다른 사물은 모두 페이드아웃 처리된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스파크가 튀어 불꽃을 일으킬 때가 있다. 튀밥 기계가 '뻥'하고 터지듯 말이다.

필자의 2016년 수첩(왼쪽)과 2017년 수첩. 2016년 수첩에 별표 마크를 해놓은 메모 '(조선은) 400년이상 벼랑이었다'는 7년만에 결국 칼럼으로 독자와 만났다. [사진= 조성관 작가]

한번은 AGT 강연 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상구 인터메이저 대표와 ‘메모의 쓸모’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대표는 내 강연을 마치 학생이 필기를 하듯 노트북으로 기록한다. 한번은 왜 힘들게 기록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가 답했다.

“강연을 듣고 나면 다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정성스럽게 한 메모가 메모로 끝날뿐 아무 데도 쓰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메모를 왜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의견일치를 봤다.

메모를 하는 것과 일기를 쓰는 것은 행위 자체가 비슷하다. 내용 면에서도 겹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경험은 과거의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지 않으면 열흘만 지나면 새카맣게 잊어버린다. 그날을 산 것은 틀림 없는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서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모든 지식근로자의 숙제이기도 하다. 개인지식관리(PKM Personal Knowledge Management)를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성패가 갈린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여기서 나온 게 제텔카스텐 메모정리법이다. 작은 단위의 메모를 연결해서 기억을 강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다. 읽었던 책 문장을 매일 상기시켜주는 ‘리드와이스(Readwise)’라는 서비스도 있다.

내가 30년 기자 생활에서 취재원으로 만난 사람 중 최고의 메모광은 LG 트윈스 염경엽 감독이다. LG 트윈스 감독을 맡아 29년 만의 통합우승을 일궈낸 야구 감독. 그는 선수로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선수로는 이름을 날렸지만 막상 지도자가 되어서는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라지는 감독이 얼마나 많은가.

염경엽 감독의 별명은 염갈량이다. 염경엽과 제갈량을 합친 조어다.

중국 후한 시대 인물 제갈량은 비상한 전략가의 대명사. 염 감독은 넥센 히어로스-SSG랜더스 감독에 이어 LG 트윈스에서 세 번째 감독직을 수행 중이다. 주루코치로 시작한 그는 어떻게 감독직에 올랐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까.

나는 그것을 독서와 메모의 힘이라고 본다. 넥센 히어로즈 시절 목동야구장 감독실에서 인터뷰를 하며 그의 책꽂이와 메모 수첩을 본 적이 있다. 책꽂이에는 인문학책이 주류를 이뤘다. 수첩에는 그날그날 경기에서 벌어진 일을 빼곡하게 기록해두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메모 수첩이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했다. 감독의 판단 미스를 포함한 경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감이다. 기록지에서 읽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독서에서 얻은 지혜를 실제 야구 경기에 접목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염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책이든 최소 다섯 가지는 배울 게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메모를 한다.”

넥센 히어로즈 시절의 염경엽 감독 수첩. [사진= 조성관 작가]

우남 이승만도 알아주는 메모광이었다. 이덕희 한인이민연구소장은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이라는 책을 쓰고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사람이다. 이덕희 소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이 우남의 메모 이야기였다.

“메모광으로 불렸던 그의 수첩을 보면 기가 막혀요. 지원금 내역과 출장 경비, 커피값 영수증은 물론 머리를 얼마 주고 깎았다, 지팡이를 얼마 주고 고쳤다 등등 단돈 1전의 용처까지 전부 기록했어요.”

이것은 괴테의 메모 습관을 떠올리게 한다. 괴테는 2년 반 동안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로마에서 본명을 숨기고 지낼 때 그는 주부가 가계부 쓰듯 모든 걸 메모했다. 심지어 매춘부를 찾아간 비용까지 다 남겼다. 이 메모를 통해 18세기 후반 로마의 사회사가 복원되었다.

프랑스인이 자부심으로 여기는 소설이 마르셸 프루스트의 ‘잊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전 7권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궁극의 문학’이라고 평가된다.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로 개인의 일상과 시대의 풍경을 재현해냈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이 책을 전부 독파한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지나칠 정도로 묘사가 세밀할 뿐만 아니라 문장이 만연체로 길어서다. ‘잊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귀족들의 살롱 문화가 주로 등장한다. 프루스트는 어떻게 이런 엄청난 소설을 써낼 수 있었을까.

메모와 일기가 원천이 되었다. 프루스트 자신이 젊은 시절 살롱 출입을 즐겼다. 프루스트는 살롱모임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전날 있었던 모든 것을 시간대별로 메모했다. 사람들과 나눈 대화까지 모두 기억해냈다. ‘잊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메모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써내려 간 작품이다.

필자의 2024년 새 수첩(오른쪽 끝)과 지난 수첩들. [사진= 조성관 작가]

나는 매년 12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다음 해 수첩을 산다. 디자인은 거의 비슷하지만 겉표지 색상이 매년 조금씩 다르다. 수첩 색상을 고를 때마다 설레고 두근거린다.

내게 축복처럼 허락된 미지의 365일. 이 수첩에 어떤 이야기들이 기록되고, 그 메모들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인가.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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