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안 보이니 모르겠지만” 법정서 막말 버젓이
시각장애인 김준형(31)씨 등은 에버랜드를 상대로 놀이기구 탑승 제한은 위법하다는 소송을 내 지난달 2심에서 승소했다. 시각장애인이 ‘티익스프레스’ 등을 탑승하지 못하게 한 조치는 위법하다는 판결이었다. 에버랜드가 상고하지 않아 김씨는 소송 8년 만에 확정판결을 받았다.
소송에선 이겼지만 법정 다툼 과정은 힘겨웠다. 재판에서 상대측이 법정 화면에 띄운 프레젠테이션(PT) 자료를 볼 수 없었고, 이를 대신할 점자나 음성 파일 등 별도 자료도 받지 못했다. 에버랜드 측이 시각장애인의 놀이기구 이용 시 위험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은 자세한 해설 없이 상황이 자막으로만 설명돼 내용 파악도 쉽지 않았다.
김씨는 29일 “법정에서 직접 주장하면 상대측 변호사가 ‘원고가 눈이 안 보이셔서 모르겠지만’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며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나빴지만 문제제기를 할 수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꼬투리를 잡는 걸로 재판부에 비칠까 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여전히 사법제도의 문턱이 높다. 법원은 장애인의 사법절차 지원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제도는 물론 법관들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개선할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씨는 첫 재판 당시 외딴섬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법관과 상대 변호사들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누가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라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김씨는 “무섭기도 하고 법정이 엄숙하고 딱딱한 분위기라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은 소송 문서를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스캔 이미지 파일로 제출하면 음성 변환도 쉽지 않다. 시각장애가 있는 김재왕 변호사는 “재판 진행 도중 재판부 내에서 조용히 얘기할 때가 있는데, 시각장애인들은 어떤 상황인지 알기 어렵다. 그런 경우도 설명해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판검사와 변호사 등의 인식 부족도 개선점으로 꼽힌다. 30년 넘게 수어 통역을 해온 수어통역사 A씨(58)는 2년 전 맡았던 재판에서 농아인(청각장애와 언어장애 둘 다 있는 사람) 사회의 문화를 재판부에 설명하려다가 “통역 외에 다른 말은 하지 말라”는 호통을 들었다. A씨는 “판사가 수어통역사를 범죄자 다루듯 취조하고 ‘피고인을 따로 만나 도와준 적 있나. 그랬다면 불리할 수 있다’며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수어통역사를 부하 직원 다루듯이 하는 판사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판사, 검사도 농아인 사건을 맡게 되면 수어 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0년 가까이 법정 수어 통역을 해온 수어통역사 B씨(55)도 최근 한 농아인의 형사사건 선고를 통역하다가 깜짝 놀랐다. 농아인은 특별양형인자로 감형할 수 있는데, 재판부가 특별한 사정 없이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농아인은 청각·언어장애를 따로 나누지 않고 청각장애로만 등록할 수 있던 시기에 장애인 등록을 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청각장애만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양형에 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B씨와 변호인이 이를 지적한 후 논의 끝에 재판부는 결국 양형을 바꿨다.
B씨는 “1심에서 양형인자가 반영되지 않아 결국 2심에서 바로잡힌 경우도 있다”며 “심지어 재판부나 검사가 농아인 등 기본적인 용어도 모르는 경우가 최근까지도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애인 등이 우선 민원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창구를 마련했고, 시각장애인에게 판결문 등을 점자 파일로 제공하거나 수어통역사 연결 및 비용을 지원한다.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올해부터 각 과에 장애인 사법지원을 도맡는 담당자를 뒀다.
하지만 여전히 홍보 부족으로 이런 절차가 있는 줄 몰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김씨는 점자 판결문 신청 절차를 별도로 설명받지 못했다. 뒤늦게 알게 된 지난 4월 2건을 신청했지만 판결문을 최종 받기까지 각각 2주와 1개월이 걸렸다. 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적힌 ‘이지리드 판결문’은 지난해 서울행정법원에서 최초로 작성됐지만 이후엔 나오지 않고 있다. 김재왕 변호사는 “법원에서 보내는 문서에 장애인 사법지원 절차 관련 안내를 포함하는 등 소송에 참여할 때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수어 통역의 경우 통역의 질이 천차만별이고, 법정 수어통역료가 방송통역 등 다른 수어통역에 비해 낮다는 지적도 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달 ‘법원수어통역 교육·인증제도 도입방안 연구’ 용역을 입찰 공고했다. 인증제를 통해 수어 통역의 질을 개선하고, 통역료 현실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법원 수어 통역 경험이 있는 신명순(44) 서울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 사회복지사는 “법률 용어 등의 어려움이나 비용 문제로 법원 수어 통역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도 개선 움직임이 있다. 최근 농아인 단체와 비공개 간담회를 가진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제도 개선 의견서를 법원과 검찰, 경찰, 법률구조공단 등 관계기관에 제출할 계획이다. 의견서에는 주요 법원에 전문 수어통역사 상시 배치, 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법률용어 사용을 위한 방안 마련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인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이지리드 판결문 등 장애인 지원 절차가 특정 판사의 개인기에 그쳐선 안 되며 사법부 시스템으로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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