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올해의 헌책방 명장면

2023. 12. 3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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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는 딱히 별스러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괜히 마음이 들뜬다.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건강하게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면 그동안 겪은 일 중에서 명장면 몇 가지를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처음엔 바람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서 날아갔을까 싶었지만, 그 정도까지 바람이 불었다면 모르긴 해도 문짝 역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카네기, 프랭클린, 그리고 톨스토이 인생론에 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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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연말연시는 딱히 별스러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괜히 마음이 들뜬다.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건강하게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면 그동안 겪은 일 중에서 명장면 몇 가지를 뽑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면 당연히 안 좋았던 일이나 후회되는 사건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을 간직한 채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 그다지 도움 될 게 없다. 가족이나 동료, 친구들끼리 만난 자리에서 서로 올해 겪은 재밌었던 일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마침 우리 헌책방에서도 얼마 전 몇몇 단골손님이 모여서 함께 서로의 명장면을 풀어놓고 내친김에 명장면에 순위를 매겨 작게 시상식까지 했다. 헌책방은 장사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여러 읽을 겪는데, 우스운 이야기부터 살짝 수상한 사건까지 다양한 장면이 내 기억을 스쳐 갔다.

올해 가장 수상한 사건이라면 단연 ‘간판 도난 사건’이다. 바람이 꽤 불던 가을 어느 날, 출근을 해 보니 입구에 붙여둔 간판이 없어진 것이다. 작은 간판이었지만 지난 8년 동안 줄곧 유리문에 잘 붙어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 처음엔 바람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서 날아갔을까 싶었지만, 그 정도까지 바람이 불었다면 모르긴 해도 문짝 역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간판을 훔쳐갔을까? 하지만 왜? 간판 있던 자리가 억지로 떼어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진 거로 봐서 누가 나쁜 마음으로 그런 짓을 했을 것 같지도 않다. 이 사건은 몇 달이 지난 지금껏 미스터리다. 앞으로도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재밌었던 사건 1위는 어느 날 느닷없이 방문한 자기계발서 마니아 손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자기가 곧 세계 최고의 자기계발서 작가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 전부터 서점을 돌아다니며 동서고금의 인생론과 처세술에 관한 책을 참고자료로 수집하고 있다는 거다. 그는 지금까지 수집해 읽은 책이 수천 권에 이른다며 자랑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카네기, 프랭클린, 그리고 톨스토이 인생론에 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놨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두툼한 책을 한 권 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생사용법’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인생론 같은 내용이 아니라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이 쓴 소설이다. 이 손님은 단순히 제목만 보고 책을 선택한 게 분명하다. 나는 ‘인생사용법’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원치도 않은 인생론 강의를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여기며 아무 소리 없이 책을 팔았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분 나쁜 일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한테 말하고 보니 나름대로 재밌는 일이었다. 마음에 있는 기분을 말하지 않으면 기분은 고여서 쌓이기만 할 뿐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마음은 결국 상처를 남긴다. 이 겨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 각자의 명장면을 풀어놓으면 말과 마음이 함께 흘러 더욱 포근한 계절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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