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에게 송구영신을 묻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시간이다.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날을 계획하는 때다. 많은 크리스천은 ‘갓생(Life with God)’을 살았는지 돌아보며 앞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다짐한다. 목회자도 다를 바 없다. 영성과 지성, 건강을 놓쳤던 순간을 아쉬워하면서 다시 소망을 품는다. 컴퓨터 목록 정리처럼 ‘새 폴더’와 ‘휴지통’ 폴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본다.
국민일보는 목회데이터연구소(지용근 대표)와 함께 지난 20일부터 26일까지 목회자를 대상으로 ‘넘버스폴(Poll)’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에서는 ‘올 한해 목사님의 생활 중 지우고 싶은 것’과 ‘내년에 목사님이 소망하는 것’을 물었으며 각각 414명, 415명의 목회자가 응답했다.
‘휴지통’ 폴더에 해당하는 질문에는 교회와 가정을 넘나들며 겪는 목회자들의 인간적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목회자들은 재정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극복할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선 목회자 10명 중 3명(29.5%)이 ‘나태한 모습’을 휴지통에 넣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가족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14%)을 휴지통에 넣고 싶다고 답했다. ‘경제적 어려움’(11.4%) ‘육체적 질병’(10.4%) ‘신앙적 슬럼프’(8.9%) ‘악화된 인간관계’(7.5%) ‘불평·불만’(6.3%) ‘감사하지 못한 것’(5.8%) 등이 뒤를 이었다.
‘기타’ 응답에서 목회자들은 ‘번아웃’ ‘설교를 더 잘했어야 하는 마음’ ‘말실수’ ‘전도하지 못한 것’ ‘성도들과 부딪힌 일’ 등을 삭제하고픈 목록으로 꼽았다.
내년 계획인 새 폴더에는 어떤 항목이 있을까. 목회자들은 ‘새로운 도전’(25.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할 반복적인 사역으로 인해 현실에 변화를 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뒤를 이어 ‘성숙한 신앙’(21.2%)이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다. ‘육체적 건강’(11.1%) ‘마음의 평안’(10.6%) ‘행복한 가정’(8.9%) ‘관계의 확장’(8.4%) 등이 뒤를 이었다. ‘경제적 만족’(7%)은 가장 낮게 집계됐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이 휴지통에 버리고 싶은 항목 중 3위로 나타난 결과와 대조를 보였다. 기타 의견에는 ‘교회 성장’이나 ‘교회 부흥’이 많았다.
김기철 한국목회상담협회 회장은 “많은 목회자가 버리고 싶은 휴지통 항목에 첫 번째로 꼽은 나태함이 자기 비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지지자 그룹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새 폴더에 넣고 싶은 항목 1위인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는 ‘새 노래로 찬양하겠다’(시 144:9)는 식의 변화와 개선을 갈망하는 신앙고백이라면 긍정적이지만, 과거와 미래에 갇혀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경우라면 새로운 도전에 앞서 현재를 면밀히 관찰하고 수용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목회자 7인에게 송구영신 계획을 직접 묻기도 했다. 여기엔 목회자 4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답변이 도출됐다. 그러나 대부분 부정적 감정이나 잘못한 일은 휴지통에, 하나님과의 동행은 새 폴더에 담으려 했다.
기독교 유튜브 채널 ‘엠마오 연구소’를 운영하는 차성진 목사는 ‘누군가에게 외면받았던 기억’을 휴지통 폴더에 넣고 싶다고 말했다. 차 목사는 “그 경험엔 제 억울함도 있겠지만 제 잘못도 있을 수 있다”면서 “두 가지 상황 모두 다시는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차 목사가 새 폴더에 담고 싶은 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풍성해지면 좋겠어요. 한 명의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일에 열심이지만 여전히 징검다리처럼 비어있는 지식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지적 만족이나 허영심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고 싶습니다.”
서울 송파구의회 의원이면서 함께심는교회 목회자인 박종현 목사는 순간순간 들었던 사람에 대한 아쉬운 마음과 부정적인 감정을 삭제하고 싶다고 했다. 박 목사는 “교회에서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가정과 교회 밖에서는 남들과 다름없는 모습이 때론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새 폴더에 ‘묵직한 지갑’을 담고 싶다는 재치있는 답변과 뭉클한 설명을 함께 전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들지만 특히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어요. 남들과 쉽사리 나눌 수 없는 그 어려움을 제 묵직한 지갑으로 시원하게 해결하고 싶습니다.”
솔직한 고백 때문인지 익명으로 답변을 준 이도 있었다. 내년을 목표로 개척을 준비하는 40대 A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상황임을 알면서도 불평하며 어려움을 호소했던 순간’을 휴지통에 담아 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개척을 준비하던 곳을 떠나 연고 없는 다른 지역에서 개척을 준비하고 있다. A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순종하며 왔지만 이 자리에서 만난 상황이 제 생각과 달리 어렵고 막막할 때가 있었다”며 “지금 주신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면서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생각을 다잡지 못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새 폴더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면서 그 길에서 하나님을 분명히 경험하는 것’을 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건지 다 알 순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이곳으로 저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는 2024년이 되길 기도합니다.”
청년부에서 목회하는 또 다른 40대 B목사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욕심과 인간적 마음을 휴지통에 담아 버리고 싶다”고 털어놨다. 목회자로 사는 부담감에서 해방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새 폴더엔 ‘한국교회 회복과 부흥’을 담겠다고 답했다.
박노아 라이트하우스포항교회 목사는 인간관계에서 마주하는 미련이라는 감정을 휴지통 폴더에 넣고 싶다고 했다.
박 목사는 “좋은 이유로 교회를 나가는 분도 계시지만 그걸 알면서도 괜히 속상한 마음이 들고 생각보다 상처가 된다”며 “그래서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이 미련”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새 폴더엔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대’를 담겠다고 했다. 박 목사는 “현재, 그리고 새롭게 방문하실 성도님들과 함께 더 건강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한다”고 했다.
목회 33년 차인 이인선 열림교회 목사는 ‘긴장과 쫓김’을 휴지통 폴더에 넣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힘 빼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새 폴더에는 ‘느긋함과 여유’를 담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한 해를 살고 싶다”고 바랬다.
휴지통과 새 폴더에는 ‘철드는 것’과 관련한 항목을 나란히 넣고 싶다는 목회자도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서울 우이중앙교회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는 서정모 목사다. 그는 먼저 휴지통에 ‘철이 드는 것’을 버리고 싶다면서 “도전해야 하는 순간 생각이 많아지기에 멈칫하는 순간이 잦아진다. 휴지통에 그 철듦을 버리고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철없는 도전’을 새 폴더에 채우고 싶다고 했다. “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면 너무 많이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말고 무조건 도전하고 싶습니다. 안 하면 0%이지만 시작하면 1%의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니까요.”
신은정 기자 se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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