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희망? '필요악' 천만 영화의 명암

성하훈 2023. 12. 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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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영화 죽이기> 천만영화로 본 한국영화산업

[성하훈 기자]

 천만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산업을 분석한 <한국영화 죽이기>
ⓒ 넥스트월드
 
지난 24일 <서울의 봄>이 역대 31번째 천만 영화가 됐다. 2003년 말에 개봉했던 <실미도>가 2004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기록한 이후 2023년까지 20년 동안 한 해 평균 1.5편 정도의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고 있을 만큼 영화산업에서 천만이 갖는 의미는 크다.

그렇다고 천만 영화의 등장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여러 형태로 나타난 천만 영화의 등장에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는 한편으로, 불편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사례도 있다.

여기서 이를 구분 짓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독과점이다. 나 홀로 모든 혜택을 독점해서 이루는 천만이냐 아니면 영화적 힘으로 꾸준히 관객을 불러 모으냐에 따라 순도가 다르게 평가된다.

최근 발간된 <한국영화 죽이기>는 '천만 영화로 본 한국영화산업'이라는 부제처럼 천만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책이다. 2022년 천만을 넘긴 <범죄도시2>까지 28편의 영화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천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과 각종 통계지표를 통해 천만 영화가 한국영화에 미치는 영향을 톺아보고 있다.

<한국영화 죽이기>에 따르면 영화의 나라 프랑스에서 지난 2004년~2019년까지 천만을 넘긴 영화는 모두 6편이었다. 천만 영화는 천운이 필요해 '신이 내린다'고도 한다는데,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27편이 나왔다. 그렇다면 신이 한국에 더 많이 내린 덕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에서의 천만 영화는 인위적 산물인 경우가 많다. 스크린 독과점을 등에 업고 다른 영화들을 밀어낸 결과가 이어진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균형적인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부작용은, 저자가 책 제목을 <한국영화 죽이기>로 붙인 이유가 됐다. 다양성이 생명인 영화산업에서 나머지 영화를 들러리 세운 채 나 홀로 질주하는 영화의 등장은 공존하고 공생해야 할 영화산업 성장에 부정적 요소가 많음을 강조하고 있다.

필요악으로 불리는 이유
 
 2018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 당시 수도권 한 극장의 시간표
ⓒ 성하훈
 
대표적으로 개봉 19일 만에 천만에 도달한 21번째 천만 영화 <인피니티 워>는 빠른 속도 만큼이나 독과점이 심했던 영화였다. 최고 상영점유율은 77.4%를 차지했고, 최다 공급좌석은 223만 석에 달했으며 전체 공급 좌석의 82.9%까지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균 좌석판매율은 28.1% 정도였다. 똑같이 19일 만에 천만에 도달한 <부산행>의 47.7%와 <택시운전사>의 44.5%와 비교할 때 낮은 수준으로 독과점의 혜택을 단단히 본 경우였다.

12일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천만을 달성한 <명량>(2014)은 최대 전체 상영의 42.4%를 점유하기도 했으나 상대적으로 독과점 논란이 거세지 않았다. 가장 많을 때 87.9%의 좌석을 채울 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천만 돌파 과정에서 스크린 독과점이 나타났으나, 뒤이어 개봉했던 <군도: 민란의 시대>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동반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큰 논란 없이 역대 최대 관객 영화를 차지했다.

<부산행>의 경우는 천만에 도달하던 날 관객 수가 1004만이었는데, 개봉 직전 주말에 2700회 정도의 대규모 유료시사회를 통해 56만을 먼저 축적해 놓은 상태였다. 다른 상영작들의 흥행에 영향을 준 행위로 변칙 개봉 행태였다.

독과점 없이 천만을 기록한 영화는 <도둑들> <해운대> <광해, 왕이된 남자> < 7번방의 선물 > <변호인> <국제시장> 등이다. 평균 상영점유율 30%를 밑도는 상황에서 꾸준한 관객의 발걸음으로 천만을 넘겼기 때문이다. < 7번방의 선물 >은 단 하루도 상영 점유율 30%를 넘긴 날이 없이 가장 모범적인 천만을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영화보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독과점이 심하게 나타났다. 최다 하루 1만 회 이상 상영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겨울왕국2> <어벤저스 : 엔드게임> 등은 역대급으로 상영을 독차지했다.

<겨울왕국>이 입소문을 타고 긴 호흡으로 46일 만에 천만 고지에 도달했다면 <겨울왕국2>는 온갖 독과점을 차지하며 17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천만에 올라 대비됐다. 당시 영진위가 이를 '불공정한 상영환경' 문제로 지적했을 정도였다. 다양성을 잠식한 싹쓸이는 영화산업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28번째 천만 영화였던 <범죄도시2>(2022)도 독과점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개봉일로부터 열흘 넘게 하루 1만 회 이상 상영됐기 때문이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영화산업이 침체된 상황이어서 독과점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한국영화 죽이기>는 "천만 영화는 영화인들에게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희망의 돛'이면서, 영화 향유권과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절망이 닻'이 되기도 하는 이중성격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천만 영화는 대단한 영화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바람직한 문화상품이자 작품이지만 필요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영화 생태계를 교란하고 다양성 파괴와 영화 향유권 붕괴 등의 부작용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영 몰아주기로 인해 다수의 빈 좌석이 양산되고 다른 영화들에 대한 기회를 박탈하기보다는 배려를 통해 영화 생태계 복원과 다양성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국영화 죽이기>는 배장수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상임이사와 권영락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운영위원이 함께 썼다. 배장수 이사는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으로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경향신문> 영화전문 선임기자,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배우로 출연한 작품만도 정지영 감독 <소년들>을 비롯해 〈장미빛 인생〉 〈태백산맥〉 〈마누라 죽이기〉 <박하사탕>을 포함 60편을 넘기는 등 한국영화의 모든 분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권영락 운영위원은 1980년대 초중반 서울예대 조교로 있으면서 태동하기 시작했던 대학영화운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던 영화운동 1세대다. 1990년대 흥행영화 <투캅스>와 배우 이정재를 데뷔시킨 <젊은 남자>의 프로듀서로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등이 만들어질 때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자문위원, 영화인신문고 중재위원, 엔터테인먼트 그룹 아이오케이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천만 영화의 특성
 
 코로나19 전후 천만영화 특성
ⓒ 원승환 제공
  
 코로나19 전후 천만영화 흥행지표 비교
ⓒ 원승환 제공
 
한편, 책과 별개로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천만 영화는 조금 다른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인디스페이스 원승환 관장이 분석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천만이 된 <범죄도시2>와 <범죄도시3>는 이전보다 상영횟수가 크게 늘었다. 전체 상영횟수에서 팬데믹 이전 천만 영화들은 <겨울왕국2>(30만 1536회 상영)를 제외하고는 30만 회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천만에 오른 두 편은 각각 35만 5768회와 31만 1915회 상영돼 30만 회를 훌쩍 넘어섰다.

한 회당 평균 관객 수도 다른 천만들이 50명~90명 정도를 오갔다면 코로나19 이후에는 34~36명을 기록하고 있다. 평균 관람료가 코로나19 이전 8000원에서 코로나19 이후 1만 원으로 올랐으나 한 회 평균 40만 원을 넘기던 매출액은 코로나19 이후에는 30만 원대로 떨어졌다.

예전보다 대폭 증가한 상영횟수 덕분에 천만에 도달했다는 것으로 독과점의 혜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순도 면에서 코로나19 이전보다 떨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의 봄>의 경우 개봉 1개월이 지난 상황에서도 하루 5000회 안팎의 상영이 이뤄지고 있어 12월 말 30만 회 상영을 넘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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