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헌기가 소리내다] 병립형 비례제가 퇴행이라고?…정치 주체들이 퇴행이다

하헌기 2023. 12. 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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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총선을 앞두고 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선거제도 보다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혁신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픽=김지윤 기자

‘아무말 대잔치’를 보고 있다. 선거제도 개편을 둘러싼 갑론을박 말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내 정치 활동의 8할을 차지하는 의제가 선거법 개정이었다. ‘정치개혁 2050’이란 초당적인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결말이 허무하다. 현재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회귀할 것인가, 아니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되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 둘째, 더불어민주당이 수차례 했던 ‘정치개혁’에 대한 약속을 어찌할 것인가.

먼저 나는 민주당과 이재명 당대표가 선거제도 개혁과 위성정당 방지를 수차례 약속했던 만큼 이를 못 지키게 되었으면, 그에 대해 직접 국민에게 정직하게 해명하고 돌파하는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당이 지켜야 할 정치적 도의와 별개로 실질적 정치개혁이라는 차원으로 보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에서, ‘병립형 회귀’와 ‘연동형 유지’ 사이에 어떤 제도적 우열관계가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본래 논점은 그게 아니었다. 핵심은 ‘어떻게 민심과 닮은 국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가령 지난 21대 총선 결과를 보자. 민주당의 지역구 득표율은 49.91%, 더불어시민당의 정당 득표율은 33.35%였다. 그런데 민주당의 의석은 180석이었다(300석의 60%). 민주당은 180석을 얻은 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반복적으로 말했지만 실제론 민심의 지지를 정확하게 반영한 의석비율이 아니었다.

지난달 1일 국회 의사당 앞 계단에서 노동당·녹색당·정의당·진보당 등 진보4당과 2024정치개혁공동행동 관계자들이 대표성과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거제 개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 여러 나라에 다른 대안이 있다. 독일의 정당명부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경우 지역구 의석 299석은 소선거구제로 채우지만 비례대표 의석 299석은 전체 의석(600여석) 중 의석 비율이 정당 득표율에 대응하도록 배분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당들은 유권자에게 지지받는 만큼 의석을 갖는다. 프랑스식 결선투표제도 있다. 1차 투표에서 유권자 수의 25% 이상의 득표를 하지 못하거나 유효투표의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하면 결선투표로 넘어간다. 이 방식의 함의는 어느 정도 사표를 방지하고 응징투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호투표보다 응징투표 성향 강해


한국의 투표 경향은 선호투표보다 응징투표에 가깝다고 해석된다. 응징투표는 내가 좋아하는 정당과 후보가 있어도 그가 ‘소수파’에 해당할 경우 그에게 투표하면 ‘내가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될 수 있다는 공포로 작동한다. 그래서 ‘사표’가 되지 않기 위해 거대 양당 중 한쪽에 표를 던지는 관성이 강화된다 본다.

즉, 선호투표를 억제하고, 다량의 사표가 발생하게 만드는 현 제도는 ‘진짜’ 민심을 왜곡한다는 게 정치개혁론자들의 논리다. 독일에선 득표율대로 의석 전체를 배분하고, 프랑스에선 결선투표가 있으니 1차 투표에선 선호투표를 할 수 있어서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한데 한국은 그 비슷한 장치가 전혀 없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주창했던 것도 그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민심과 닮은 국회’를 구성하는 정치개혁을 해보자는 거였다. 골자는 ‘소선거구 폐지’였다. 한국에서 독일식 제도를 하려면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하는데, 의원정수 자체를 늘리거나 지역구 의석을 줄여 비례대표로 전환해야 했다. 불가능하다. 전자는 국민이 허락하지 않고 후자는 선거법을 개정할 권한이 있는 지역구 의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거구제를 대선거구로 개편하면 의석 구조는 그대로 두면서도 승자독식 선거제를 파훼할 수 있게 된다. 대선거구에서 득표율대로 국회에 들어올 수 있게 설계할 수 있으니 국민도 선호투표를 하고, 민심과 닮은 국회를 만들 여지가 생긴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는 논의 끝에 ▶중대(中大)선거구제(도농복합형) 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 ▶소(小)선거구제 권역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개방명부식 대선거구제 전국?병립형 비례대표제 등 세 가지 안을 마련해 국회 전원위원회에 넘겼다.

하지만 그 주장은 누구도 아닌 국민에게 파산 선고를 받았다. 정개특위에서 공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국민은 소선거구 유지, 비례대표 확대를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의원 정수에 관해선 숙의 전보다 숙의 후에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늘었단 점이 고무적이나 최종 결과는 여전히 의원정수 확대(33%)보다 의원정수 축소(37%)와 현행유지(29%)가 더 높았다. 민심을 받들어 비례대표 확대를 하려면 지역구를 줄여야 했다. 그러나 선거제 개혁을 주장하는 꽤 많은 국회의원도 중 누구도 자기 지역구를 내려놓겠단 사람은 없었다.

성찰해야 할 게 있다.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결국 ‘국민적 합의 강도’가 아주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연동형 비례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강도가 높고, 위성정당이 유권자를 엄청 분개하게 만다는 일이어서 정당 득표율에 큰 영향을 줄 정도라면 사실 따로 ‘방지법’이 필요 없다. 비례의석 몇 개 얻자고 선거에서 패하는 선택을 하는 정당은 없기 떄문이다. 하지만 위성정당이란 ‘꼼수’를 쓰면 유권자가 그 당을 ‘심판’하기는커녕 그 위성정당에 표를 줄 거라는 걸 정치인들도 안다. 사실은 방지법을 만들어봤자 그 당 인사 출신들이 만드는 형제정당, 자매정당이 생길 뿐이다.

이는 국민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한 적도, 그 논의에 제대로 참여한 적도 없기에 생긴 일이다. 제도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없는데, 심지어 다른 거대 정당과의 합의도 없이 강행처리를 했으니 기형적인 정치 상황이 계속 벌어진다. 국민의힘 입장에선 합의해준 바도 없는 제도이니 위성정당을 만드는데 거리낌이 없다. 즉, 제도의 문제 이전에 ‘합의’라는 본령을 우습게 여긴 정치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다양성 확보 위해 정당 운영 방식 변해야


선거제 논의를 둘러싸고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당제가 정치 극단화를 막는다’, ‘신생 정당이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와 같은 좋은 명분들과 ‘그래도 선거에선 이기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넘실댄다. 혹자는 병립형 비례제를 ‘퇴행’이라고 한다. 그러면 현행 연동형 비례제 하에서 거대정당들의 자매정당 사돈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건 ‘진보’인가? 그런 ‘신생’ 정당들에 무슨 ‘다양성’이 있는가? 보통 그 자매정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거대정당들보다도 훨씬 ‘강성’이다. ‘중도 확장’을 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대정당들과 달리 주로 ‘매운맛 지지층’에게 어필하면 의석을 획득하는 자매정당들이 과연 정치 극단화를 완화할까 아니면 더 촉진할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지역구 예비 후보자 등록을 하루 앞둔 11일 서울 양천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예비 후보자 등록 접수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예비 후보자 등록 접수는 내년 3월 20일까지 진행된다. 뉴스1
다양성을 확보하고 싶으면 정당운영을 그렇게 하면 된다. 직능·지역·성별·세대 등 다양하게 안배해서 유리한 지역구나 비례 당선 순번에 공천하면 될 일이다. 다당제가 정치 극단화를 막는다? 남미와 유럽에서 부는 극우정당의 광풍은 뭔가? 이탈리아,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전부 다당제 국가인데 세 나라 모두 극우파가 집권하거나 제1당에 됐다. 제도가 무엇이든 정치의 ‘주체’가 ‘친윤’이니 ‘친명’이니 하는 기준으로 정당운영을 하면 제도가 무엇이든 정치는 극단화되고 획일화된다.

‘신생 정당이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하니 연동형을 유지하자’는 이야기나 ‘선거에선 이기고 봐야 하니 병립형으로 가자’는 말 역시 ‘아무말’인 건 마찬가지다. 21대 국회의 준연동형 비례제에선 유의미한 3당이 없었다. 오히려 병립형일 때 국민의당, 민주노동당, 자민련 같은 제3당이 선전하곤 했다. 기존 정치세력이 불신받고 신진 세력이 지지받으면 제도가 무엇이든 국회에 들어온다. ‘병립’이라 이길 수 있고, ‘연동형’이라 지는 게 아니다. 어떻게 유권자의 신뢰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대선, 지선, 총선 전부 압승해놓고도 승자의 저주에 걸려 심판받은 민주당 입장에서 ‘선거는 이기고 봐야 한다’는 말은 반쪽짜리 답이다. ‘이겨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제도가 옳고, 어느 제도는 틀렸단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제도는 다 장단이 있다. 그렇지만 각각의 정치적 ‘주체’들이 책임 있는 정치를 하지 않거나 본인이 속한 정당을 책임 있는 정당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도외시하는데도, 정치가 멀쩡히 굴러가게 만들어주는 ‘제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제 개혁에 진심으로 활동한 후배 정치인으로서 여쭙는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정치하는 건 정말로 제도 때문인가? 제도만 바꾸면 우리가 다 멀쩡해지는가?

하헌기 더불어민주당 전 상근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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