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 '바냐 아저씨'와 말의 바깥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서는 안톤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가 연극으로 공연된다. 갈등과 고뇌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지나고 나면 그저 또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주고, 지금의 위기는 조만간 지나간 위기가 될 것이라고 연극은 말한다. 갈등을 겪고 싸움도 하고, 심지어 총질도 하고, 이별도 하고... 그리고 또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 언뜻 대단하지 않은 개인들의 삶이 세상을 채우고 움직이며 그것들이 모이고 쌓여 시대의 강을 만든다. 딱히 교훈도 가르침도 아니다. 그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 속에서 관객과 개인 들은 각자의 삶을 투영해 보고 생각을 길어 올릴 것이다. 이 희곡을 하나의 작품으로써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액자처럼 들어가 있는 한 장면에서 발견한 언어의 깊은 층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속 연극에서 소냐 역을 맡은 배우(박유림 역)는 청각 장애인이고 수어(手語)를 한다. 연극 밖에서 그런 배우가 연극 안에서도 자기 언어로 대화하는 설정이다. 영화 속의 연극배우들은 국적과 언어가 다르고 그들은 일본어와 중국어와 독일어와 한국어 등 각자의 언어로 대사를 한다.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속 여러 언어들, 관객은 번역된 대사를 자막으로 보게 되고 배우들은 각자의 언어로 자기 몫의 대사를 한다. 여기서 언어는 본질적 기능으로 존재하고 그 차이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보는 이들은 배우들의 다중 언어 대사가 그리 낯설거나 거슬리지 않는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소냐의 수어다. 영화에서 수어를 하는 한국 배우가 맡은 연극 속의 소냐는 영화에서 부여된 하나의 '캐릭터'다. 그녀는 한국어 수어를 한다. 나는 수어를 모르지만, 그 손의 움직임과 표정과 몸의 자세에서 한 언어의 당당한 기품 같은 것을 느꼈다. 말과 행동에 품위와 수준이 있듯이 수어에도 그런 세계가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 배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배우의 능력 때문인지, 사람의 몸짓이 만들어 내는 교감의 위엄인지, 둘 다인지 알기 어렵다. 그저 언어에 관심 있는 수용자(관객)로서 말하는 것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난 뒤 연극의 마지막에 소냐가 바냐 아저씨에게 말한다. 소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바냐 아저씨의 뒤에서 그를 감싸 안듯이 몸을 숙여 손의 움직임과 표정과 동작으로 이야기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바냐 아저씨는 소냐가 뒤에 있기 때문에 소냐의 말을 보기보다는 몸으로 느낀다. 음성 언어의 세계에서 온몸이 귀가 되는 것과 같다. 사실 수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언어의 사용에서도 우리는 손짓과 표정과 함께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언어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소냐는 바냐 아저씨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한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그 완만한 대화에서 '행복'인지 '불행'인지 '생각'인지 '참는' 것인지(아니면 다른 뜻인지)를 말할 때는 다섯 손가락을 둥글게 구부려 손가락 끝으로 아저씨의 머리를 '톡' 친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아니 한 번 봐서는 해당하는 단어를 알기 어렵다. 그 모호한 단어를 둘러싼 짐작만으로 마음속에 온기가 돌았다. 수어 하는 이를 수소문해서 물어보거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 단어의 뜻을 알 수 있겠지만 꼭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둘의 관계와 교감의 순간이 중요하지, 단어의 의미는 차후의 일이었다. 연극에서 '듣는' 사람의 머리를 건드리거나 쓰다듬는 것은 앞을 보고 있는 바냐 아저씨의 뒤에서 그가 느낌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마주 볼 때의 수어 표현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톡 치는 것이리라 짐작된다. 소냐의 모든 말들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바냐 아저씨가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자세의 말이었다. 소냐의 말은 '내가 네가 되는' 말이었고, 2인칭이 1인칭이 되는 대화였다. 수어를 모르는 사람도 그 언어 표현들이 그대로 몸에 닿아서 마음으로 통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위로의 말이 건네는 진짜 손길이 닿는 느낌 말이다. 분절의 음성 언어가 아니라 이어지는 몸의 언어였고 말의 바깥을 감싸는 손길과 몸짓과 기운이 함께 말이 되어 온몸의 감각으로 전해졌다. 말하는 사람의 몸짓이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데 '나'와 '너'가 따로 없는 대화, 독백이면서 대화인 소리와 몸짓과 손길과 뺨의 촉각이 함께 하나의 말이었다. 각각의 음높이로 내는 작은 소리들이 화음이 되어 무대를 조용히 채우는 음악 같았다. 말이 다할 수 없는 사람의 모든 언어가 지닌 넓고 깊은 세계였다. 본 것이 아니라 보였다. 소냐의 행동은 고요하고 나직했다.
상상 속에서 벌어지던 언어와 몸짓과 배경의 장면들이 완전히 다른 시각 언어로 실현되고 보여주는 차이를 경험하는 것은 놀라웠다. 언어의 바깥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이미지와 표현과 존재 들로 가득하다. 인간의 세계에는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들이 공존하지만 그 경계와 실체를 말하기 어렵고, 우리가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들 속에는 어렴풋하고 복잡한 관계들로 가득하다. 언어의 바깥에는 언어가 보여주는 세계보다 더 크고 다양한 세계가 건재하고, 때로는 그 일부가 언어와 손잡고 드러나기도 한다. 알고 보면 말의 안과 밖이 모두 언어다.
지금도 그 ‘단어’의 의미를 모른다. 몰라도 괜찮다. 마크 트웨인은 에세이 ‘나의 이탈리아어 독학기’에 ‘뜻이 분명치 않은 단어 하나가 차갑고 실용적인 확실성을 지닌 문단 전체에 몽롱한 금빛 불확실성의 베일을 드리우기도 한다’(‘천천히 스미는’, 봄날의책)고 썼다. 그 단어를 몽롱한 채로 남겨두기로 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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