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안중근 ‘유묵’이 생각나는 연말

류정민 2023. 12. 29. 11:3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이의 죽음은 사회에 메시지를 남긴다.

그런 이들은 가족이 남겨 놓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그대로 떠안은 채 절망의 늪으로 빠지고 만다.

이기심으로 오염된 사회에서 '의로움'의 불씨를 되살리는 일.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2024 갑진년(甲辰年)을 기다리는 우리 사회를 향한 묵직한 울림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은 사회에 메시지를 남긴다. 유명인의 죽음만 그런 건 아니다. 평범한 이의 사연에도 교훈은 녹아 있다. 지난 10월16일 사건도 그런 경우다. 광주시 북구 연제동 한 아파트. 수억 원 빚에 시달리던 모녀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80대 엄마 A씨와 50대 딸 B씨. 그들은 왜 함께 생을 마감했을까. 자필로 쓴 3장의 유서에 그 이유가 담겼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모녀는 어려운 형편에도 적지 않은 돈을 남겼다.

안방 서랍에서 발견된 800만원은 자기 장례비용이었다. 이와 별도로 아파트 관리비 명목의 40만원도 유서와 함께 봉투에 넣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 노력한 모습. 모녀의 심성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단란한 가정이 파탄에 이른 것은 B씨 아빠의 별세와 관련이 있다. 가장은 세상을 떠나면서 수억 원의 빚을 남겼다. 가족은 빚을 갚으려 노력했지만,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 사건이 안타까운 이유는 법의 안전망만 제대로 작동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족이 거액의 빚을 남기고 숨지면 남은 가족이 이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행법에는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다.

상속을 포기할 수도 있고, 남긴 재산의 범위에서 채무를 변제하는 ‘한정승인’ 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민법 제1019조에 규정된 국민의 권리다. 문제는 아무 때나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상속이 개시된 것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2020년 2월14일 서울 중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42일 만인 그해 3월 26일 순국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가족을 잃은 충격과 슬픔 때문에 한정승인 신청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법에 관한 지식의 부족 때문에 한정승인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도 있다. 그런 이들은 가족이 남겨 놓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그대로 떠안은 채 절망의 늪으로 빠지고 만다. 힘겨운 상황에 놓였을 때 주변의 누군가가 상속 포기(한정승인) 제도를 안내했다면 어땠을까.

광주 모녀의 죽음은 2023년 한국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 타인의 고민과 아픔에 무감각한 세상은 모두에게 불행이다.

광주 모녀 사건은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와도 맞닿아 있다. 전국 교수들은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부끄러운 내용이다.

안중근 의사는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유묵(遺墨)을 남겼다.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내용의 자기 다짐이다. 역사의 위인은 자기 목숨을 내걸고 견리사의를 실천하고자 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견리망의를 추구한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올해의 사자성어를 추천한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는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다"고 일갈했다. 각자도생의 서글픈 그림자가 우리 삶을 짓이기는 상황을 방치해서 되겠는가.

이기심으로 오염된 사회에서 ‘의로움’의 불씨를 되살리는 일. 그건 어떤 이의 생명을 살리는 실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2024 갑진년(甲辰年)을 기다리는 우리 사회를 향한 묵직한 울림이다.

류정민 사회부장 jmryu@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