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세대교체를 기다리는 이유
이념을 넘어 전혀 다른 시각의 새로운 사람들 전면에 나서야
한동훈 비대위 면면이 공개됐다
“왜 허구한 날 진영 타령이냐” 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정치판에 과감히 가져온다면 기꺼이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내 또래인 교수님은 아주 쿨하게 말했다. “진영 갈등이 심각하긴 하죠. 그런데, 저는 별로 걱정 안 합니다.” 대선을 치르고 몇 달 안 됐을 때였다. 보수와 진보가 0.7% 포인트 초박빙 승부를 겨룬 그 선거는 차라리 전쟁이라 불러야 했다. 상대 진영을 향해 퍼붓는 혐오와 저주의 포화 속에서 나라가 둘로 쪼개진 듯했다. 이 전쟁의 서막인 몇 해 전 조국 사태는 또 어땠나. 서초동과 광화문에 실제로 진을 친 두 진영은 같은 것을 가리키며 정반대 주장을 외쳤다. 진영의 광기를 아스팔트에 쏟아낸 그 싸움판이 선거판을 거쳐 이제 정치판에 고착되자 대화도, 타협도 죄다 증발해버렸다.
그래서 심리적 내전 상태에 빠진 것 같다, 갈등 공화국이란 말을 실감하겠다, 과연 풀릴 수 있는 갈등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어느 밥상머리에 올랐을 때, 그 교수님이 꺼낸 해법은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사람이 바뀌면 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과 부대끼며 매일 느끼는 건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이념은 세상을 바라볼 때 쓰는 안경 같은 거잖아요? 그들은 완전히 다른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20, 30대가 장차 여론 주도층이 되면 지금의 진영 갈등은 자연히 사라질 겁니다.”
채소로 고기 맛을 내는 대체육 개발자들은 이런 논리를 편다. ‘육식주의자에게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설득하기보다 고기를 먹는 행동이 사실은 채소를 먹는 일이 되도록 만드는 게 낫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교수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사람의 생각을 바꿔 해소하기란 정말 어렵다.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사람 자체를 바꾸는 게 빠를 것이다.’
돌이켜보면, 진영 갈등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하며 영남과 호남을 갈라놓았다. 이를 ‘망국병’이라 부르며 온갖 정책과 캠페인을 동원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 했지만, 우리가 지역감정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건 결국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아마 호남의 지지로 당선된 영남 출신 대통령 노무현의 등장이 그 분기점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낸 동력은 노사모란 젊은 집단에서 시작됐다. 그가 태어난 지역보다 그가 내세운 가치에 주목한 ‘새로운 사람들’.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이들이 나타나 목소리를 내면서 비로소 지역감정의 벽을 넘어 그 지독한 갈등을 뒤로 할 수 있었다. 교수님이 말한 사람의 바뀜을 정치판에선 세대교체라 한다. 세대교체가 발휘하는 갈등 해소 효과를 우리는 이렇게 이미 경험했다.
어느 시대나 많은 사람이 갈구하는 것이 있다. 한때는 산업화였고, 다음엔 민주화였으며, 공정한 게임의 룰이기도 했다. 이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거여서 시대정신이라 일컫는데, 갈등도 그렇다. 어느 시대나 많은 사람이 휩쓸리는 사회적 갈등이 존재하며, 지역감정이 진영 갈등으로 바뀌었듯이 역시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시대정신에 부응하려 무척 애를 쓰지만,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시대갈등’은 오히려 편리하게 이용해 왔다.
표를 얻는 데 진영만큼 수월한 장치도 없다. 내 진영의 콘크리트 지지층에 선거 때 잠시 중간지대 표를 더해 51 대 49의 승리를 노리는 전략이 언제부턴가 정치판의 공식이 됐다. 산속에 들어가선 산의 형세를 볼 수 없듯이, 진영에 갇혀서는 그것이 유발하는 갈등의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부조리를 보기 어렵다. 하물며 진영에 안주해 적극 활용하는 이들에게 이 갈등의 극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진보의 386은 686이 됐고 보수의 콘크리트는 6070이 됐으니 우리는 진영 갈등을 너무 오래 겪었다. 바꿀 때가 됐다. 교수님은 생물학적 세대교체를 말했지만, 지금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대교체는 과거 노사모가 지역감정을 그리 봤듯이 진영 논리를 고리타분해 하는 이들의 등장일 것이다. 여당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세우며 “탈진영 정치의 적임자”라 했다. 28일 비대위 면면이 공개됐다. 젊고 낯선 이들이 많은데, 좀 더 지켜보려 한다. 만약 이들이 “아니, 왜 허구한 날 진영 타령이냐” 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정치 전면에 과감히 가져온다면, 나는 그것을 환영할 준비가 돼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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