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중국 인민은행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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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경제 시절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990년대 말까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한은 총재가 아닌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인민은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과감한 통화정책으로 세계 경제 구세주로 떠오르며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앙은행으로 우뚝 섰다.
중국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지자 시진핑 주석이 금융 정책까지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인민은행 권한을 축소하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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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경제 시절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990년대 말까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한은 총재가 아닌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재무부 이재국의 금융정책과 사무관이나 서기관이 금리 정책 실무를 조몰락거렸으니 한은이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는 건 당연했다. 2000년대 초 한국을 흔든 외환은행 헐값매각 시비로 기소됐다 무죄로 풀려난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국장도 통화정책 주무 사무관이었다. 70~80년대 금정과 발령은 ‘대통령 빽’ 없으면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같은 과에 근무한 이철휘 언론인공제회이사장은 사석에서 “당시 장관이 통화정책을 갓 발령 난 변양호에게 맡겨 그 빽을 알아봤으나 찾을 수 없어 우리끼리 실력을 인정받아 발탁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한은은 법 개정으로 1998년 독립기관이 됐지만,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금융감독기구 개편으로 은행 감독이란 막대한 권한을 신설 금융감독원에 내주어야 했다. 이후 직원들 사이에선 경제연구원으로 전락했다는 자조가 끊이지 않는다.
중국 인민은행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채택에 따라 통화정책을 거머쥔 걸 보면 위상 강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편이다. 인민은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과감한 통화정책으로 세계 경제 구세주로 떠오르며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앙은행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요즘 인민은행 처지가 말이 아니다. 중국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지자 시진핑 주석이 금융 정책까지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인민은행 권한을 축소하고 있어서다. 공산당 산하에 신설한 중앙금융위원회가 인민은행의 고위직 임명에 대한 발언권을 갖게 되면서 인민은행장의 서열이 공상은행장과 농업은행장 밑으로 떨어졌다. 국가금융감독관리총국(NFRA)이 인민은행 주요 지점 1600개 이상을 흡수할 것이란 얘기도 떠돈다. 한치의 양보 없는 미·중 간 공급망 다툼 속에 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두 중앙은행의 협업마저 실종되지 않을지 우려된다.
이동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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