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어떤 영웅과 세일즈맨
타인의 시선에 따라
선택하거나행동하진 않는지
올해도 친구와 연말 시상식을 열었다. 올해의 책이 뭐야? 올해의 영화는? 올해 사물은? 식당은? 인물은? 시상식의 규모와 범위는 시간과 와인만 있다면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선정목록과 심사평을 들려주며 서로의 생각과 취향을 나눌 수 있는 유익한 연말 행사다. 물론 “올해는 책을 거의 못 읽었네”라든지 “최근에 본 영화밖에 생각이 안 나” “얼마 전에 산 소파가 정말 마음에 들지만, 할부가 내년까지라 내년의 사물로 꼽아야 할까 봐” 같은 고백과 함께 싱겁게 끝나는 분야도 있다.
나에게 올해의 최고 영화는 아쉬가르 파르디 감독의 ‘어떤 영웅’이었다. 3월의 어느 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에 반하고, 감독에게 반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가게 된 주인공 라힘은 여자 친구가 우연히 주운 금화들을 팔아 보석금을 내려고 한다. 하지만 누나의 만류로 금화를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언론에 영웅으로 소개가 된다. 이혼한 아내에게는 형편없는 남편이었고 채권자에게는 여전히 무능한 죄인이지만, 하루아침에 선행의 아이콘이 되고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한 사소한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로 이어진다.
영화는 평범한 남자가 죄인인 동시에 영웅이 되고, 오히려 불행해지는 모습을 긴장감 있게 그린다. 돌려주기 싫었지만 누나에게 들켜 금화를 주인 찾아준 일은 영웅적 선행일까? 주인인 줄 알고 금화가 든 가방을 건넸는데 진짜 주인이 아니었다면? 우연히 찜찜하게 얻은 명예도 그토록 소중한 것일까? 사소한 거짓말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영화는 다양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 주인공과 사건을 비추며 묵직한 질문들을 내놓는다.
그 질문들은 영화를 본 이후에도 일상에서 불쑥 떠오르곤 했다. 자신이 갖게 된 부나 명예에 대한 집착, 그걸 지키려는 노력은 우리 일상에 수없이 펼쳐진다. 작은 위선이나 거짓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잠깐의 인상이나 들려오는 얘기, 단면만을 보고 타인을 먼저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여럿이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추앙하거나 누군가의 잘못을 비난하며 도덕적 우월감과 소속감을 느끼는 일이 스크린 밖 여기서 매일 벌어진다.
친구에게 올해의 영화를 발표하고 집에 돌아와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를 봤다. ‘세일즈맨’은 ‘어떤 영웅’에서 느꼈던 개성과 매력은 그대로이면서 연극적 요소가 더 강했다. 공간은 무대 같고, 화면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주인공 부부의 직업도 연극배우다. 라나와 에마드는 살던 집이 붕괴될 위험에 처해 급히 이사를 한다. 새집에 혼자 있던 라나는 남편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지만 낯선 남자에게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만다. 경찰에 신고하면 아내의 사정이 알려질까 봐 남편 에마드는 집요한 추적 끝에 직접 범인을 잡는데, 범인은 예상과 달리 가족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백미가 시작된다. 밀폐된 공간에서 드러나는 세 사람의 입장과 그 사이의 분노, 사죄, 용서 등이 충돌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남편 에마드에겐 아내를 위로하는 것보다 분노와 복수가 우선이다. 노인의 가족에게 폭로하는 것으로 복수하려 하지만 노인에겐 차라리 죽음이 낫다. 피해자인 아내 라나는 자신의 치욕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남편을 말린다. 남들이 모른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인간은 어떤 일들을 벌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졌던 질문이다.
‘어떤 영웅’에서처럼 ‘세일즈맨’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명예가 가장 중요하다.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입장에만 충실함으로써 갈등과 비극은 탄생한다.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는지, 타인의 시선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지는 않는지, 나와 우리를 돌아보기에 좋은 영화들이다. 영웅과 죄인은 한끗 차이다.
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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