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와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나의 실수로 혹은 원치 않는 일들에 휘말려 그동안 내가 일궈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성취와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삽시간에 사라지기도 합니다.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말씀도 많이 하시지만 데이터는 조금 다릅니다. 영국 바이오뱅크(UK Biobank)의 15만7000여명 대상 연구에서는, 일반인 두 명 중 한 명이 재난적 외상 (catastrophic trauma)을 보고합니다. 갑작스러운 공격, 강도나 강간,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나 질병, 전투, 주변의 폭력적인 사망사건의 생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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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의지와 관계없는 각종 사고
‘어차피’라는 비관에 쉽게 빠져
그럼에도 연대와 긍정이 희망
」
내 삶을 위협하는 외상적 경험은 여러 회의적인 질문들로 나의 뇌에 장난을 칩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나의 노력과 시간이 나를 다시 배신할 텐데 계속해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있을까.’
이럴 때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갑옷이 냉소주의와 비관주의입니다. ‘어차피’로 시작되는 많은 말은 참 매력적입니다. 자신을 통달한 위치로 올립니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도 강력하기에 더욱 매력적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노력해 봤자,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나는….’ 심리치료 중 자살사고가 있는 내담자에게 자주 설명하게 되는 이른바 ‘터널시야’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왜곡된 생각은 상황의 어두운 측면만 바라보게 하고 주변의 다른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 역할을 합니다. 더욱이 내가 갇힌 이 터널은 칠흑처럼 캄캄한 데다 구불구불하기까지 하여 그 구부러진 터널의 코너, 그 끝에 이를 때까지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올해 9월, 원숭이들을 위협적인 자극에 노출시킨 후 이들의 판단 변화를 살핀 연구가 한 저명 학술지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연구에서 원숭이들은 포식자인 뱀 사진을 본 직후 주변 상황을 비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듯 행동했습니다.
‘현실을 보다 보니 비관적이 된 것이지 나라고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항변을 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일부는 사실일 것입니다. 정말 좋아서 한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쉬운 길을 선택했을 수는 있습니다. 비교적 쉽고 편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길입니다. 나의 노력과 삶과 사람들을 냉소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는 것은 지금 당장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남길까요? 아무것도요. 냉소와 비관은 아무것도, 심지어 주변 사람의 생의 에너지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극강의 비관주의로 들어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라면, 어차피 지거나 혹은 심지어 이기는 것이 정해진 게임이라면, 당신은 그저 어떤 모습으로 이 길을 가는 것이 당신에게 더 어울릴지에 집중하세요.
그러니 어려운 길로 가세요. 그게 더 어울립니다. 누구도 갈 수 없는 길로 가세요. 내가 왜 이런 것들을 감내해야 하는지 원망스러운 선택을 하세요. 행복감의 주요 원천인 ‘몰입’은 내 능력치보다 더 도전적이고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만 경험할 수 있기에, 쉬운 길을 갈 이유는 더욱이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슬픔이 가득할 때 대체 내게 어떤 선택권이 있냐 물으시겠지만 분명 우리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친절한 태도.
그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의 비극과 불의의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이며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의 경험에서 꺼내어 올린 통찰의 정수 역시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겠지만 단 한 가지,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태도를 선택하고 나만의 방식을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주요 비평가 단체로부터 165개의 상을 받으며 영화사상 최다 수상작으로 기록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 역시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건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제발,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라면요.”
자신의 실수로 혹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재난적인 상황으로 더는 게임을 할 수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삶이었다며 비관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의 이 난이도 높은 삶에 다시 몰입하는 것을 결심하세요. 그 터널의 코너를 돌면 어쩌면 터널의 출구입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연대하고, 긍정하고, 희망을 찾으세요. 그 어려운 길이, 우리에게 더 어울립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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