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느는데 공급은 ‘뚝’…전세대란 다시? [스페셜리포트]
2023년 초만 해도 역전세난 우려가 컸던 전세 시장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서울·수도권 주요 단지에 전세 수요가 몰리면서 일부 단지 전셋값이 수억원씩 반등하는 모습도 보인다. 새해 이사철이 다가오면 역전세난이 아닌 전세난을 걱정해야 할 처지라는 분석도 나온다.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5차에서는 전용 100㎡가 9억원에 전세 세입자를 찾았다. 2023년 8월 비슷한 면적의 직전 전세 계약서가 6억3000만원에 쓰였던 점을 고려하면 구축 아파트 전세가 3개월여 만에 2억7000만원(42.9%)이나 뛴 셈이다. 한양5차 전용 100㎡(총 81가구)가 9억원대에 전세 거래됐던 것은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1년 말~2022년 초 단 두 가구에 불과했다. 전고점을 거의 회복한 수준이다.
가파른 상승세 속에 전셋값이 최고가를 경신하는 단지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129㎡는 12월 들어 직전 거래보다 무려 14억원이나 오른 39억원에 거래가 체결돼 전세 최고가를 경신했다.
2023년 6월 입주를 시작한 강남구 대치푸르지오써밋 전용 59㎡는 입주 초기에만 해도 9억원대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으나, 같은 해 11월에는 13억원을 찍었다. 이주한 지 2년 넘은 대치르엘 전용 77㎡도 같은 달 말 14억5000만원에 전세 계약서를 써 5일 만에 신고가를 갈아치웠다.
강남권뿐 아니라 양천구에서도 전세 신고가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 서남권 대표 구축 대단지인 목동신시가지 단지에서는 최근 최고 가격으로 계약한 전세 거래가 연이어 발생했다. 1단지 전용 96㎡는 2023년 10월 8억3000만원에 거래돼 기존 최고 가격인 8억원(2022년)을 넘어서더니 11월에는 8억6000만원에 세입자를 받아 한 달 만에 신고가를 경신했다. 4단지 전용 94㎡ 역시 11월 8억1000만원에 거래되며 최고 전셋값을 기존보다 4000만원 끌어올렸다. 같은 달 강서구 화곡동 ‘우장산한화꿈에그린’ 전용 84㎡는 7억원에 전세 최고가 거래를 맺었다.
주요 단지를 중심으로 전셋값 상승이 이어지면서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9개월 만에 3.3㎡당 2300만원을 넘었다. KB부동산 주택 가격 통계에 따르면 2023년 11월 서울 아파트 3.3㎡당 평균 전셋값은 2308만5000원으로 집계됐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2023년 1월(2398만3000원) 이후 줄곧 하락세를 보였고 같은 해 7월에는 2245만1000원까지 내렸다. 그러다 8월부터는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강남 11개구 전셋값은 전월보다 평균 0.95% 올라 강북 14개구(0.82%)보다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강남 11개구 중에서는 강서(1.48%), 영등포(1.45%), 강동(1.18%), 송파(1.13%) 등의 오름세가 두드러졌다. 강북 권역에서는 용산 전셋값이 2.98% 올라 서울 전체 지역 가운데 가장 상승폭이 컸다. 성북(2.13%)도 2% 이상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서울에서 전월보다 전셋값이 떨어진 지역은 관악(-0.18%)이 유일했다. 같은 기간 수도권 전셋값도 0.85% 올라 전국 평균 상승률(0.64%)보다 상승폭이 컸다.
저렴해진 전세대출·입주 물량 ‘뚝’
전세 가격이 급격히 뛴 이유는 빌라 전세사기 여파 등으로 아파트 전세 선호 현상은 짙어진 반면 전세 공급은 감소하고 있어서다.
2022년부터 지속된 고금리 기조, 전세사기 여파로 임차인들은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만 해도 집주인(임대인)들은 역전세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역전세는 2년 전 전세 계약 때보다 전셋값이 하락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진 상황을 뜻한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월세 선호 현상이 늘어나면서 월세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시중은행 전세자금대출 금리가 낮아지자 전세를 찾는 이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2022년 하반기 최고 6%대까지 치솟았던 시중은행 전세자금대출 금리는 최근 3~4%대로 떨어졌다. 전세사기 여파로 빌라나 단독·다가구주택 대신 아파트를 선호하는 임차인이 많아진 점도 달라진 모습이다. 주택 매매 시장이 하락세를 겪는 동안 매매 수요가 전세로 이탈하며 전셋값 상승세에 더욱 힘을 실었다.
전세 수요는 늘어나는 데 반해 공급이 줄어드는 점도 전셋값을 끌어올렸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2023년 12월 21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3만6488건으로 집계됐다. 1년 전 5만5059건과 비교하면 1년도 안 돼 33% 이상 줄어든 규모다. 같은 기간 경기와 인천 지역 매물도 각각 39.3%(6만8999건 → 4만1903건), 45%(1만5830건 → 8710건) 급감했다.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지난 1월 60.7에서 4월(75.7), 6월(87.2), 8월(92.6) 연일 오름세를 보였다. 전세수급지수는 기준선 100보다 높으면 전세 수요가 많고, 낮으면 공급이 많다는 얘기다. 100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전세 공급보다 세입자 수요가 더 많아졌다는 의미다. 전셋값이 급락하면서 이제는 저점을 찍었다는 인식이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빌라나 오피스텔 같은 비아파트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파트 전세로 눈을 돌리는 수요가 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 분석이다.
금리·공급·실거주 의무 ‘변수’
상황이 이렇자 시장에서는 전셋값 상승세가 2024년에도 지속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2024년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역대 최저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전세대란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반면 지금과 같은 전세 상승 추세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서울 아파트 전세가가 오른 건 지난해 워낙 낮았던 전세가의 기저 효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아파트 매매 가격 상승세가 둔화하는 추세고,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하락 전환한 거래가 나오는 만큼 급격한 상승은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한국건설산업연구원도 2024년 주택 매매 가격은 2% 하락하고 전셋값은 2% 오르는 데 그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다면 2024년도 전셋값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는 무엇일까.
새해 전세 시장을 좌우할 주요 변수 중 하나는 ‘금리’다. 금리가 내리면 전세 자금을 대출받는 비용이 낮아져 전세 수요를 늘리는 요인이 된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끝내고 인하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한국은행도 기준금리 인하를 검토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시장이) 금리 인상 사이클의 정점이나 그 근처에 와 있다”며 금리 인하 전망을 부인하지 않았다.
물론 2024년 금리 인하가 시작된다고 해도 당장 전셋값이 크게 내리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권대중 서강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금리가 2023년까지 열 차례 걸쳐서 올랐던 것처럼 금리를 내린다 해도 한 번에 0.25%씩 소폭 조정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전세 수요 또한 금리 변동 속도에 발맞춰 서서히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대로 금리 인상 또는 인하폭이 시장 예상치를 크게 벗어날 경우에는 전셋값이 요동칠 여지가 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시장은 금리가 내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오히려 동결되거나 오르면 전세 수요가 큰 폭으로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두 번째 변수는 입주 물량이다. 2024년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역대급으로 감소하는 탓에 전셋값이 크게 오를 것이라고 보는 인식이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2024년도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1만921가구로 추산됐다. 올해 집들이를 한 3만2975가구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2024년으로 예정됐던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 재건축) 1만2032가구 입주 시기가 2025년으로 밀린 영향이 크다. 서울뿐 아니라 2023년 12월 전국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도 지난해 같은 기간 3만5475가구보다 1만가구 이상 감소한 2만4509가구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은 2023년 12월 발간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2024년 서울 지역 입주 물량 감소에 따라 전세 가격이 추가적으로 상승할 경우 매매 가격에도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진단했다. 윤지해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전세 물량은 이미 2022년 연말과 비교해 반 토막 수준”이라며 “전세 물량이 부족해 전셋값 상승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수도권 내 신축 아파트 입주 물량 감소는 2024년 전월세 임대차 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그간 신축 위주로 반영되던 물가 상승분이 2024년 기존 구축 단지로 빠르게 반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여기서 입주 물량 증감은 지역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서는 입주 물량이 크게 줄었지만, 지방이나 지역에 따라 물량 공급이 계속 이뤄지는 곳도 적잖다는 것. 지방의 경우 수도권처럼 전셋값이 급등하진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 수석연구위원은 “공급 부족에 시달리는 서울·수도권과 달리 신축 아파트 공급이 많은 대구나 경북 등 지역은 전셋값이 오히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세 시장에서 미분양 물량은 공급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분양 물량이 많은 지방 전셋값은 현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윤 수석연구원의 분석도 정도의 차이일 뿐, 맥락은 비슷하다.
또 2024년 전셋값이 상승하더라도 ‘아파트’ 전세에 한해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전세사기 여파 이후 빌라, 오피스텔 등 비(非)아파트 전세 시장 침체는 장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방에 따르면 올해 전국 주택 전세 거래 총액은 아파트 181조5000억원, 비아파트 44조2000억원으로 조사됐다. 비중을 살펴보면 아파트 80.4%, 비아파트 19.6%다. 주택 전세 거래총액에서 비아파트 비중이 20% 미만으로 떨어진 경우는 2011년 주택 임대 실거래가가 발표된 이후 처음이다.
김준형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2024년에도 비아파트 수요가 아파트로 옮겨 올 가능성이 큰 만큼 아파트 전셋값은 추가 상승할 것”이라며 “다만 공급량에 따라 지역적으로는 차등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전셋값을 낮출 변수도 꽤 남았다. 전문가들은 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공급 정책, 규제 완화 등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예컨대 당장 새해부터 신생아 출산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신생아 특례 전세자금대출은 실수요자의 자금 여력을 높이고, 전세 수요를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2024년 실거주 의무가 폐지될 것인지 도 전세 시장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서울·수도권 입주 물량 부족이 예고된 상황에서 2년 실거주 의무가 유지될 경우 집주인은 전세를 들이지 못하고 직접 잔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전세 공급난이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국토부에 따르면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는 수도권 아파트는 2023년 11월 기준 총 72개 단지, 4만7595가구에 달한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명예교수는 “현재 아파트 공급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실거주 의무까지 남아 있어 전세 매물이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며 “2024년에도 전세 수급이 계속 악화할 경우 전세 가격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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