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일곱 어절의 법 조항, ‘美 페미니즘 혁명’ 50년 이끌다

김남중 2023. 12. 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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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지음, 노시내 옮김
위즈덤하우스, 624쪽, 2만9000원
미국 교육계에 적용되는 성차별 금지법인 ‘타이틀 나인’ 제정을 이끌어낸 핵심 인물들. 왼쪽부터 민권 변호사 폴리 머리, NOW(전국여성단체) 공동 창립자 소니아 프레스먼 푸엔테스, 교육계 성차별 문제 최초 진정자 버니스 샌들러로 1977년경에 촬영된 사진이다. 하버드대 래드클리프연구소 슬레진저도서관 제공


“미국에서는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72년 제정된 미국 교육개정법 제9편, ‘타이틀 나인’의 첫 문장이다. 37어절로 구성된 이 법률 문장은 이후 미국 여성 운동과 사회정의 운동의 등대가 되었다.

타이틀 나인은 성차별 금지법이고, 교육계에 한정해 적용하는 법이다. 여학생 입학과 여자 교원 채용에서의 차별을 금지한 이 법은 여성의 스포츠 활동 기회 확대, 성폭력 근절과 예방, 소수자 권리 보호 등으로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가며 ‘페미니즘 혁명’을 이끌어 왔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이래 가장 중요한 법’으로 불린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셰리 보셔트가 지난해 출간한 ‘타이틀 나인’은 이 법이 태동한 순간부터 현재까지 50년의 시간을 살핀다. 어떤 법의 여정 또는 회고인 셈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1970년대 이후 미국 여성 운동사이기도 하다.

2019년 91세로 세상을 떠난 버니스 레스닉 샌들러는 ‘타이틀 나인의 대모’로 불린다. 1969년 메릴랜드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던 41세의 샌들러는 교수직 채용에 지원하지만 남성들과 달리 모교에서조차 면접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겪는 상황이 ‘차별’이라는 걸 느끼고, 이것이 문제라는 법적 근거를 찾아낸다. 1967년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행정명령에서 연방정부 계약자에 의한 성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발견한 것이다.

“대다수의 대학교가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행정명령에 따르면 대학교에서 이뤄지는 성차별은 분명히 불법이었다.” 샌들러는 이를 근거로 자신의 문제를 진정했고, 다른 사례들도 수집해 고발하기 시작했다. 여학생들, 여성단체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대학의 성차별 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조사에 착수했다. 의회에서는 공청회가 열렸다.

당시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과 인문대학원 정년 보장 교수 474명 중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국 의학전문대학원들은 1960년대에 여성 신입생 비율을 평균 7∼10%로 제한했다. 어느 대학의 여자 정교수는 대학원을 갓 졸업한 남자 조교수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

여성들의 각성과 연대가 타이틀 나인을 탄생시켰고 이후 타이틀 나인에 근거한 여성들의 요구와 소송, 투쟁이 이어졌다. 여학생들은 타이틀 나인을 근거로 학교에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또 학교가 성폭력을 근절하고 방지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성적 지향 때문에 괴롭힘이나 불이익을 당하는 학생들 역시 타이틀 나인을 보호 수단으로 발견했다. 그렇게 타이틀 나인과 이를 둘러싼 훨씬 더 큰 규모의 여성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인의 삶을 더나은 방향으로 크게 변화시켰다.

“1971∼72학년도에 전국적으로 7%였던 고등학교 대표팀 여자 선수 비율은 1981∼82학년도에 35%로 훌쩍 증가했다.”

“2015년, 오해로 인한 성폭행 초래를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동의’ 방침이 최소한 800개 대학과 캘리포니아주에 도입됐다.”

“2016년에는 최소한 13개 주와 워싱턴DC, 그리고 추가로 다른 4개 주의 수백 개 교육구가 학교에서 발생하는 젠더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했다.”

“2018년에 여성 전임 교수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달했다.”


책은 타이틀 나인이 걸어온 여정을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이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학생, 운동가, 민권변호사, 법률가, 의원, 공무원 등 수십 명의 이야기를 담아내 흥미롭게 읽힌다. 책은 한 사람의 용기가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실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한 걸음을 내딛으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또 싸워야 한다는 것 등을 알려준다.

타이틀 나인 통과 이후 반발에 맞서 싸우는 것은 법안 통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역풍이 불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타이틀 나인에 대한 공격 수위는 높아졌다. 책은 역풍에 맞서며 세대를 이어가며 여성들이 싸워온 과정을 보여준다.

2016년 미국에서는 반여성적 인물로 유명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딸이 걱정을 하자 노년의 샌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참정권 운동을 했던 여자들은 가는 길이 평탄치 않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어. 그들은 장애물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운동을 멈추지 않았어. 사는 동안 그들이 하는 일의 결과를 보지 못할 것도 알았고. 그래도 하던 일을 꿋꿋이 이어갔어.”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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