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명시는 왜 장군에서 여자로 강등되었나

윤일희 2023. 12. 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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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을 통해 본 김명시의 생애

[윤일희 기자]

역사가 지운 혁명가 중에 또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김명시 장군이다.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로는 유일하게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상당히 거물급 인사였다. 그런 그에 대한 기록은 '백마 탄 여장군'에서 '무직 여자'로 극과 극을 오갔다. 그는 왜 '장군'에서 '여자'로 강등되었을까? 그 까닭은 김명시 장군의 이름이 역사에서 소거된 정황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시 가족은 마산의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생선 행상를 하던 어머니 김인석은 3.1운동 때 독립을 외치다 희생되었고, 그의 오빠 김형선과 동생 김형윤도 독립운동을 하다 스러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12세였던 김명시는 9살, 4살 두 동생을 돌보느라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지만, 야학으로 공부해 마산공립보통학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이후 배화고녀를 다니다 중단한 후 1925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떠났다. 주세죽, 허정숙, 김조이 등의 혁명가들이 수학한 그곳이다.

탁월한 조직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벌인 김명시(1907~1949), 김형윤(1910~?) 남매
ⓒ 윤성효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수학 후 그는 일신의 편안함을 버리고 1927년 상해로 떠난다. 장개석의 쿠데타로 공산주의자들이 시체가 즐비한 그곳에서 그는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만주 전역을 돌며 중공 한인 특별지부를 결성하는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한다. 23살이었다. 피 끓는 김명시는 1930년 5.31 하얼빈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에 참전해 큰 성과를 올리며 무장투쟁가로 이름을 알린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김명시는 <코뮤니스트> 4호 원문과 격문을 국내 반입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국내에 잠입한다. 임무 완수 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조직하려던 김명시는 그만 몇 개월도 안 되어 체포된다.

당시 그가 관여한 인천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14시간 일하고도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다. 이에 노동자들을 규합해 차별 철폐, 임금 인상, 악질 감독관 교체를 요구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각성하고 있었다. 앞선 1931년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자 강주룡은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며 을밀대에 올랐다. 깨어난 여성들이 노동자의 권리와 일제의 억압에 항거해 노동투쟁에 투신했다.

일제에 체포된 김명시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옥중에서 청춘을 보내고 7년 후인 1939년 서른두 살에 출소한다. 감옥을 나왔어도 일제의 <보호관찰령>이 삼엄해 운신을 할 수 없자 그는 조선을 탈출해 중국 팔로군에 종군한다. 항일투쟁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1942년 팔로군 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후신인 조선의용군 창군에 기여한다. 조선의용군은 무정(김병희)을 사령관으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유일한 군대로 김명시의 활약이 대단했다.

국내로 진공하려던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의 계획은 일본의 항복으로 물거품이 됐다. 조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닌 해방은 반쪽짜리였다.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됐지만 항일 무장혁명가들은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선 환국할 수조차 없었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한반도의 운명을 움켜쥐었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불안정해지며 좌와 우로 분열했다.

김명시는 1945년 12월 13일 평양에 도착한 후 이어 서울로 내려왔다. 그가 입성하자 모든 언론은 일제히 '김명시 여장군' '연안에서 돌아온 혁명투사' '조선독립동맹의 영수'라 칭송했다. 그는 바삐 움직였다. 전국을 돌며 강연회 연사로 활약하며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1945년 12월 18일 해방 후 최초로 여성운동 단체인 <부녀동맹 마산지부>를 결성한다. 서울 곳곳에 부녀동맹을 알리는 광고가 나붙었고 80만 회원으로 부녀총동맹이 결성된다. 하지만 남한의 상황은 혁명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급박하던 기류는 동아일보 <모스크바 삼상회의> 오보로 급선회한다. 김명시의 운명도 이로 인해 좌초된다. 조선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핵심내용을 누락시킨 보도는 좌우익을 극렬히 대립하게 만들었다. 좌익은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며 조속히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한 반면, 우익은 미 군정의 의도대로 반탁운동에 나서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47년 5월 20일 미소 공동위 소련대표단으로 스티코프 대장이 서울에 왔을 때 그에게 환영의 꽃다발을 전달한 사람이 김명시였다. 이때 그는 여맹 대표단과 함께 인민위원회와 좌익활동을 탄압한 미 군정에 대한 항의와 앞으로의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소련 대표단에 꽃다발을 준 장면은 그를 타도할 골수 좌익의 좌표로 찍게 만들었다.

이후의 역사는 주지하듯 좌익 초토화로 이어졌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겐 일제보다 더 가혹한 탄압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살육을 피해 월북했지만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숙청됐다. 살벌한 사건들 통에 김명시가 잠적했다. 1947년 8월부터 1949년 10월 10일 그의 죽음이 발표되기까지 2년 3개월의 시간이었다.

의문의 죽음

1949년 10월 13일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 김명시 사망에 관해 기자회견 장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본적을 경남 마산시 만동 189번지에 두고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유상동 16번지에 사는 무직 김명시(42)라는 여자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난 9월 29일 서울시 경찰국에서 부평경찰서에 유치 의뢰한 것으로 지난 10일 오전 5시 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백마 탄 장군'으로 추앙받던 독립운동가가 '무직의 여자'로 불리며 의문사를 당했지만, 이후 이어진 언론 보도와 수사 발표는 의혹투성이였다. 군 수사기관인 특무대에 체포된 경위, 서울경찰청에 조사받다 왜 부평경찰서로 옮겨졌는지, 불과 어린아이 키에 불과한 삼척 높이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한다는 게 가능한지, 누가 시신을 수습하고 인수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등 무엇도 밝혀지지 않았다. 10대부터 42살까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삶이 이토록 참혹하다니...
마산 시민단체 희망연대는 철저히 망각된 독립운동가 김명시를 복원하기 위해 2019년 1월 국가보훈처에 독립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순조롭지 않았다. 사망 경위 등 해방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2번 탈락했다, 2022년 8월 15일 마침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희망연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흉상 건립, 생가터에 표지석 설치, 친족 찾기 운동 등을 벌이며 조국이 버린 독립운동가를 마산 시민의 영웅으로 되살렸다. 책 <김명시>도 그의 일환이다. 희망연대와 시민들의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독립운동가였던 김명시 장군의 후손을 찾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 윤성효
 

한편 아쉬운 점도 있다. 김명시 장군 역사 복원의 주역이었던 <희망연대>의 김영만 상임고문은 김명시를 "명시 누나"로 불렀다. 김명시는 1907년 생이고 김영만은 1945년 생이다. 동향의 웃어른에게 친숙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40여 년의 차이가 무색하게 '누나'라는 가족적 호칭으로 부르는 게 적절할까. 유관순 독립운동가를 아직도 유관순 '누나'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일 텐데, 어떤 남성 독립운동가도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김명시를 기리는 기념행사에서 그를 '마산의 딸'로 호명하는 것도 불편했다. 안중근이나 윤봉길 의사를 '00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활동가인 여성들에게 '할머니'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곤 하는데, 이들은 그저 여성 노인이 아니라 당당한 인권운동 활동가다. 어째서 유독 여성에게만 가족의 호칭을 당연한 듯 호명하는 걸까.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에게는 그에 걸맞은 호칭이 마땅하다.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을 접하며 시종일관 가슴이 두근거렸고 또 그만큼 아팠다. 영화 <암살>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일기 시작하면서,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하나 둘 세상에 나왔다. 권기옥, 강주룡, 김알렉산드라,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이화림, 정칠성 등 불러도 불러도 사무치는 이름들이다.

일제를 지나 해방 공간까지 한반도는 격동의 시대였다. 김명시를 연구한 워싱턴대 교수 남화숙이 "가장 용감하고 가장 치열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민족을 위한 형극의 길을 걸은 여성이다. 주의나 노선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그녀의 치열한 투쟁 정신과 민족애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듯이, 독립운동가의 이념을 문제 삼아 그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일생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책을 덮고 나니 문득 마산에 가고 싶어졌다. 위대한 혁명가가 나고 자란 그곳에서 그를 본떠 만든 흉상을 어루만져 보고 싶다. 그리고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김명시 장군님! 고맙고 미안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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