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민들레 홀씨처럼…시청자 마음에 날아가 희망 싹 틔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고민하는 민들레役
천륜의 속박 벗어날 용기 못냈지만 '병명은 엄마'
극약처방 통해 해묵은 불안 마주하며 한발 나아가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민들레(이이담)는 철두철미한 간호사다. 환자는 물론 동료와도 거리를 두고 업무에 매진한다. 외골수는 아니다. 감정을 박탈당한 길든 가축에 가깝다.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넘긴다. 괴로움의 원인은 도박에 빠진 어머니.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아도 달라질 기미가 없다.
"나 열다섯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했어. 대학도 내 힘으로 갔고, 장학금 한 번 안 놓쳤어. 놓치면 휴학해야 하고, 휴학하면 엄마랑 그만큼 더 살아야 하니까. 내가 안 독해지고 배겨?" "그래서 간호사 됐잖아.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나 빚 갚으려고 간호사 된 거야. 근데 빚이 계속 늘어나. 내가 더 힘든 건 빚은 갚으면 사라지는데 엄마는 안 사라진다는 거야."
그녀에게는 두 가지가 결여됐다. 사랑과 자존의 욕구다. 전자는 사회집단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그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바람, 후자는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인간은 두 가지가 있어 단순한 육체적 생존이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 생존을 중시한다. 사회집단에서 배제되거나 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하락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
욕구를 상실한 민들레는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존재 자체와 전체로서의 나를 부끄러워한다.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불안과 공포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대다수가 경쟁에서의 패배로 원초적 혹은 사회적 위협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배우 이이담은 민들레가 사람다운 삶을 찾는 과정에 정동적 건강(Emotional health)을 그린다. 예컨대 불안을 성장과 인식을 제한하는 등 감정 영역을 좁혀 표현한다.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나아가 인식을 넓히는 얼굴을 표현해 자아 확대를 가리킨다. 현대인이 행복해지기 어려운 근원적 이유를 파헤치고 적극적 해결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이이담을 만나 민들레에게 부과된 과제에 관한 생각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민들레는 해묵은 불안을 마주하기조차 두려워한다. 무의식적 회피가 양식화된 듯하다.
"속마음을 드러내는데 서툰 인간이다. 속박에서 벗어날 용기도 내지 못한다. 그저 피한다. 병원은 그걸 잊는 최적의 공간이고.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탓이 크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머니가 언급하는 '천륜' 같은 단어에 얽매여 있다. 황여환(장률)을 만나지 못했다면 영영 관계를 끊지 못했을 거다."
-병원에선 누구보다 능동적이다. 특수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그런 면에선 충분히 성숙해 보인다.
"병동에서 인정받을 정도니까 변화할 동력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방향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옳은지 모른다. 그걸 알려주는 이정표가 황여환이다. '엄마 버려요'라는 말로 새로운 선택의 길을 열어준다. 자아의 순수한 발현도 촉진하고."
-병동에서의 착실하고 꼼꼼한 태도가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봤나.
"인정욕구가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대출이 잘 나온다는 이유로 간호사가 됐으니 아예 없진 않겠다. 자신의 가치가 부정당하길 두려워했을 거다. 하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환경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을 듯싶다. 바깥이 가시밭길이니까 일하는 시간을 즐겼을 것 같다."
-민들레는 차기 수간호사로 불릴 만큼 철저하나 이따금 인간미를 노출한다.
"애초 건조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정다은(박보영)처럼 친밀한 면도 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러 반대로 보일 뿐이다. 병동에서 일정한 선을 긋고 지내 더 그럴 수 있다. 누군가는 그걸 가면이라 부르더라. 나는 민들레다움이라 일컫고 싶다."
-심리학에서 불안한 사람은 누구와도 마음이 이어지기 어렵다고 한다.
"연기하면서 체감할 수 있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황여환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이유 같더라. 민들레가 환자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황여환 같은 연인의 사회적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병명이 무엇일까.
"'엄마'다. 버리라는 대사가 약이고. 처음 대본으로 접했을 땐 충격받았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말을 쓸 수 있지'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그런데 연기해보니 수긍이 가더라. 민들레는 행복해지고 싶은 바람보다 불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고. 멀리서 볼 땐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이해됐다.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희망이 담긴 결말 덕에 후유증을 겪진 않았을 듯하다.
"연기하면서 바랐던 마침표는 아니지만, 민들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 같았다. 해피엔딩이라서 그런지 아쉬움이나 섭섭함은 다른 작품보다 덜했다. 오히려 민들레의 고민을 해결하고 나온 것 같아 개운했다. 때때로 '잘 지내고 있지?'라며 안부를 묻고 싶을 정도로."
-본인의 해석과 판단이 연기에 적잖게 반영된 듯하다.
"여느 때보다 대본을 많이 읽고 동료 배우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그 덕에 수동적 연기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재규 감독 앞에서 고집을 부린 적도 있다. 지문으로 적히지 않은 표정 등에 대해 자주 의견을 냈다. 민들레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셨는지 웬만한 의견은 다 받아주셨다. 너무나 감사했다."
-민들레는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더라. 어쩌면 이 드라마의 아침을 가장 고대하는 배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 그렇게 명명했을지를 두고 한참 고민한 적이 있다. 홀씨가 생각나더라. '후'하고 불면 날아가서 새 땅에 꽃을 피우는. 그런 존재로 표현하고자 했다. (조연이라서) 자주 보이지 않아도 시청자 마음에 슬며시 자리해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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