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를 보다가 '줄서기'로 끝난 오사카 여행
[홍성식 기자]
▲ 오사카 인근 교토를 여행하며 만난 낯선 골목길. |
ⓒ 홍성식 |
'여행'이란 뭘까? 사람은 왜 자신이 일상을 보내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경한 시간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수십 년 동안 수십 개 나라를 돌아본 이들도 선뜻 "그건 말이지..."라고 시작되는 답을 꺼내기 쉽지 않은.
나 역시 위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봤고, 주위에서 유사한 궁금증을 드러내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만났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행하는 이유를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 30개쯤의 국가를 헤매고 돌아다니며 깨달은 건 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그게 동양이건 서양이건, 백인이 주류인 국가이건 황인이 모여 사는 나라이건 흑인이 다수인 곳이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통칭 '지구인들'은 그 삶의 형태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게 내 생각.
그러나 세대 차이는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같은 시간, 동일한 정치·경제·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X세대와 MZ세대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행위의 저변에 깔린 사고체계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난 달 다녀온 일본 오사카 여행에서도 그 '간극'을 확인할 수 있었다. MZ세대는 X세대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어떤 게 그랬냐고?
▲ 오사카 도톤보리의 초저녁 풍경. 간판 속에서 ‘글리코’가 웃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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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하면 도톤보리죠."
그래서 알게 됐다. MZ세대의 오사카 여행 핫 플레이스는 '도톤보리'란 걸.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이 의문에 <두산백과>는 아래와 같은 답을 들려준다.
"도톤보리(道頓堀)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번화가다.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신사이바시와 달리 서민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 난바로 이어지는 에비스바시에서 동쪽의 닛폰바시에 이르는 지역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독특한 간판이 많다. 특히 에비스바시의 글리코 제과점 옥외 간판은 지역의 트레이드마크다. 에비스바시는 젊은이들의 난파(젊은 남성이 처음 본 여성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행동을 일컫는 일본어)로 유명하다. 오사카를 대표하는 다코야키 가게, 회전초밥 식당, 유명한 라면집 같은 음식점도 흔하다."
숙소에서 도톤보리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 유명세를 익히 들었으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해가 질 무렵에 찾는 게 좋다"는 정보까지 알아냈으니 늦은 오후에 토톤보리행 지하철에 올랐다.
과연 그랬다. 서울에 비유하자면 홍대 앞 젊음의 거리와 명동을 합쳐놓은 것 같고, 경북 포항에 빗대 말하자면 영일대해수욕장 번화가와 맛집 많은 쌍용사거리를 모아놓은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 중국과 서양의 MZ세대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난파(길거리 헌팅)가 이뤄진다는 다리'에도 가봤는데, 여행자가 워낙 많아 누가 누굴 유혹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난파'라는 행위가 이제 사라진 것인지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이름난 음식점이나 카페가 아닌 길 한가운데 10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것도 낯선 풍경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가 동일한 지점에 서서 순서대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가끔 다리를 들어올리기도 하는 젊은이들의 카메라 렌즈에 담기는 건 흰색 운동복을 입은 사람을 그린 커다란 간판. 그림 속 사람은 '글리코'라고 했다.
MZ세대가 만들어낸 도톤보리 거리의 긴 줄을 입 벌리고 바라보는 X세대에게 '글로코'가 뭔지 여행안내서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도톤보리 초입에 위치한 에비스바시 주변에는 다양한 네온사인이 눈길을 끄는데 그 중에서도 '글리코' 네온사인이 가장 눈에 띈다. 1935년 글리코 사인이 도톤보리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글리코의 마라토너가 오사카 돔과 가이유칸, 쓰텐카쿠, 오사카 성을 돌아 도톤보리에 골인한다는 내용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은 오사카의 명물이 되었고 기념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 오사카 주점들의 간판은 화려하고 익살스럽다. |
ⓒ 홍성식 |
라면, 초밥, 심지어 타코야키 먹으려 해도 줄 서 있어야
도톤보리를 특정할 수 있는 단어 중엔 '줄서기'가 포함돼야 마땅하다. 비단 '글리코' 만이 아니었다. 이름난 초밥집과 라면집은 물론, 거리에서 타코야키(takoyaki, 밀가루 반죽에 조그맣게 자른 문어와 파 등을 넣고 한입 크기로 구워낸 음식)를 파는 노점 앞도 '줄...줄...줄'로 가득했다. 그 줄 속엔 MZ세대가 다수.
지난 여름. 정년퇴직을 앞둔 50대 후반 선배와 냉면을 먹으러 갔다. 지역에서 소문난 맛집이라 가게 앞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선배는 찌푸린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내 돈 주고 점심 사먹으면서 무슨 줄까지 서냐. 다른 식당으로 가자."
얼마 전 X세대 친구들 셋이 서울 홍익대 인근 거리에서 클럽에 입장하려고 길게 줄을 늘어선 젊은이들을 봤다. 한 친구가 말했다.
"강남역 근처 클럽도 저렇다더라. 대체 이 추운 날 왜 저러는지 난 이해가 안 돼. 너희는 이해 되냐?"
이건 세대 간 차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나 역시 '삶의 즐거움 중 절반은 먹는 즐거움'이라 생각하는 사람임에도 3박4일의 오사카 여행 중 이름난 초밥집이나 라면 가게 앞에서 줄을 서본 적은 없었다. 그게 토톤보리였건, 다른 유명 관광지였건. 그러니 타코야키 좌판 앞 줄에 섞일 이유도 없었고, 글리코와 함께 사진 속에 담기려고 줄을 설 생각 또한 눈곱만치도 없었다.
식당과 카페, 클럽과 포토 존에서 길고 반듯한 '줄'을 만들어내는 MZ세대는 X세대인 내게는 생소한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먹어버린 나이 탓만이었을까?
▲ 오사카 시내를 오가는 낡은 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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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 오사카 거리에서 몸을 데워준 따끈한 어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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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기차표와 버스 티켓을 예매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전. 명절을 맞은 기성세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차 티켓이나 버스표를 사기 위해 역이나 터미널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섰다.
그보다 한 세대 전.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은 먼 나라에서 원조품으로 보낸 밀가루나 빵을 얻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만들어진 긴 줄에 섞여야 했다.
앞서 '세대 간에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사고체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보다 더 큰 전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말도 했다.
그랬다. '자발성'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게 어떤 국가건 어떤 인종이건 어떤 민족이건 어떤 세대건 줄을 서보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거나 없을 터. 이는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 중 하나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다녀온 오사카 여행은 적지 않은 즐거움을 선물했고, 거기서 지루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기도 했다.
밤늦은 닛폰바시 거리에서 맛본 따끈한 어묵, 도심을 오가는 낡은 전철, 화려하면서도 익살스런 통천각 주변의 주점 간판들, 오사카 인근 교토의 청수사 아래 정감 가득한 골목, 그리고 '토톤보리의 스타 중 스타' 글리코까지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도착한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만들어낸 '줄'에 섞였다. 항공기 발권 수속에서 보안검색대까지 자그마치 1시간 50분을 지루한 '줄 속'에 서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오사카 여행은 '줄'에서 시작해 '줄'로 끝났구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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