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서의 정통 '삼국유사' 편찬한 일연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의 근원(뿌리)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한민족 불멸의 사가임에 분명하다.
우리 고대에 수많은 사승(史乘) 해동고기, 단군기, 삼한고기, 신라고기, 고려국기, 고구려유기 및 신립, 백제서기, 제왕연대력, 신라수이전, 화랑세기, 한산기 등등이 인멸한 오늘에 있어 고대 사실을 전하는 것은 약간의 금석문 이외에 사책(史冊)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편성한 것으로서 연대상으로 보면 <삼국유사>보다 약 140, 150년 가량 앞선 것이나 <삼국사기>는 지나의 소위 정사에 의(擬) 하여 기전체로 된 것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지나식 필치와 유교적 정신에 붙들려 왜곡 윤색을 가한 결과 필삭(筆削)에 조솔(粗率)의 혐을 면치 못하고 미사여구는 도리어 사실의 본면목을 흐리게 하였다.(김상기, <일연>, <조선명인전(상)>)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일연, 1206~1289)은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견명(全見明), 자는 일연 또는 회연(晦然), 호는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 이다. 아버지는 벼슬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가문은 향리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9살에 지금 전남 광주의 무량사에서 공부하고, 14살 때에 설악산 진전사의 장노(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어린 나이에 먼 곳에 가서 공부하고 구속계를 받은 까닭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후 승과에 급제하고 포산(包山)의 여러 사찰들을 거쳐, 1249년(고종 36) 최이(崔怡)의 처남인 정안의 초청을 받아 남해 정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연과 가지산문(迦智山門)이 최씨정권과 연결되었으며, 남해분사에서의 대장경 조판작업에 일연 계통의 승려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선사(修禪社)와 사상적으로 교류하게 되었다. (김영미, <삼국유사>, <신형식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사>)
일연은 승과 시험에 급제하여 22년 동안 달성군 현풍면 소재 비슬산 대견사에서 초임 주지를 지내고, 1246년 41살에 선사가 되었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던 시기이다.
국왕 원종의 부름으로 1261년 임시수도인 강화도에 가서 선원사의 주지로 임명되고,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인흥사에 이어 개경 광명사 등을 거쳐 1283년 충렬왕이 국존(國尊)으로 추대하고, 이듬해 노모를 봉양하고자 인각사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삼국유사>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고려·몽고 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준비하고, 한편 고려에서는 몽고군과 전쟁을 계속하면서 불심으로 몽고군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아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살았던 일연이 만년에 <삼국유사>를 편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즉 우리 역사를 단군조선에서 시작함으로써 몽고족이 갑자기 일어난 신흥국가임에 비해 우리나라를 중국과 대등한 오랜 역사를 가졌음을 나타내고, 일시적으로 몽고의 압제를 받고 있지만 곧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고 보인다.
둘째로 유교사관에 입각한 <삼국사기>와 달리, 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법을 선양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김영미, 앞의 책)
일연은 국난기에 민족의 정통성을 밝혀서 대몽항전의 정신적 기조로 삼은 것은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대성과 오류를 바로 잡고자 거대한 역사(役事)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고전 중에도 중보(重寶)인 <삼국유사>는 그의 명칭으로 본다면 다만 삼국의 사적을 적었을 것 같으나 실은 종으로 상고시대 전부에 긍하였으며(부분적으로는 고려 중엽까지 미친 사항도 있으나) 횡으로는 삼국은 물론이요, 삼한·가락·부여·발해·말갈 내지 낙랑·대방 등 고려 동방의 각 부족과 국가 전체에 넘나들었고, 다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 (史實)·토속·신화·전설·사상·신앙·가요·기타 유문결사를 원형대로 수록한 것이니 말하자면 본서는 우리 고대 생활사의 전부를 건드린 최대의 종합적 문헌이라 할 것이다.(김상기, 앞의 책)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별도로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와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효선(孝善) 등을 기록하였다.
<삼국유사>는 국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으로 파악하였다. 더욱이 중국의 요(堯)와 같은 시대로 인식하고, 단군의 조상은 직접 천신(天神)에 연결시켰으며 기자조선은 고조선 끝 부분에 약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정통성이 단군조선―위만조선―부여·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로 계승된다고 봄으로써 한국사 인식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말갈의 별종이라고 하면서도 기이편에 넣는 것은 한국 고대사의 체계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가락국기>를 따로 수록하였고 왕력에도 가락을 따로 설정하는 등 <삼국사기>와는 달리 가야사를 강조하였다. 이는 일연이 가야권문화와 가까운 현풍의 비슬산의 여러 절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경남지방에 10여 년을 거주하였으며 남해에 머물면서 가야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김영미, 앞의 책)
일연은 무인지배 시대, 몽고군의 침략으로 강토가 온통 쑥대밭이 된 난세에 <삼국유사>라는 거대한 민족사료를 편찬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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