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엘리트 정치 대체할 새 정치체제 필요

2023. 12. 28.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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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엘리트 중심의 현 대의제로는 다양한 정치요구 해소에 한계
지금은 ‘결과’보다 ‘과정’ 중시 ‘국민에 의한 정치’ 필요한 때
중앙정부·국회·중앙당 권한을 지자체·지역의회로 이전해야

“위기란 옛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백 기간에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에 나오는 말이다. 그람시의 이 어록은 21세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자주 인용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트럼프주의, 브렉시트, 포퓰리즘의 확산 등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위기 현상의 배경에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붕괴가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한 진보적 신자유주의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불평등과 혐오 정치가 극에 달했는데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질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람시 어록은 한국 정치의 위기를 설명하는데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옛것)는 죽어가는데 이를 대체할 새 민주주의 체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실 대의민주주의 위기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민주 국가에서 국회와 정당 같은 대의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죽어가는 옛것을 대체할 새 정치방식을 찾아야 하는데도 여전히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문제다.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엘리트(대표) 정치 헤게모니’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수백년 지속한 산업사회는 지나갔고 우리는 이제 정보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는 생산양식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심지어 사람까지 다른 속성을 지닌다. 산업사회의 표준화, 통일화, 집중화 원리는 정보사회에서는 다양화, 복잡화, 분산화로 대체됐다. 개인의 선호가 획일화됐던 대중사회는 지나갔다. 대량생산의 시대가 마감되면서 대중민주주의 또한 기능을 잃었다. 개인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추구하고 정치적 선호와 요구 또한 정치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복잡해졌다. 대중민주주의는 대중운동, 대중정당, 대중매체와 같은 대량 투입 시스템에 반응할 수 있게 디자인됐다. 따라서 파편화된 조각과 같은 다양한 정치적 요구에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옛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전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진영 갈등과 악마화 정치는 공백기에 나타나는 위기 현상이다. 2023년 한해 정치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야당 대표 체포동의안도 가결됐고, 현직 장관 탄핵소추도 있었다. 거대 야당의 일방적 법안 통과에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 여야 모두 정치개혁의 기치 아래 혁신위원회를 가동했으나 갈등만 키운 채 중도 하차했다. 총선을 눈앞에 둔 지금 정치권은 선거제도 개편과 공천 혁신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정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옛것, 즉 엘리트 중심의 대의제를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한 데 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여전히 위기 탈출의 방안을 옛것에서 찾는다. 선출된 대표가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는 산업사회와 함께 소임을 다했다. 이제는 다양화, 복잡화, 분산화라는 정보사회의 핵심 원리에 맞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새 정치제도가 담아야 할 핵심 가치는 권력 분산이다. 중앙정부·국회·정당 대표에게 집중된 권력을 지방과 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사회에서 소수의 엘리트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국민을 위한 정치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새 정치는 국민에 의한 정치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결과를 중시했다면, 국민에 의한 정치는 과정과 절차를 더 중시한다. 비록 엘리트 통치보다 못한 결과를 얻더라도 정보사회의 시민은 자기결정권과 자기지배권을 더 중시한다.

중앙정부와 국회 권력을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로 이동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이 관공서나 공기업 이전에 그쳐선 안 된다. 입법·행정·재정에 있어 중앙정부 권한을 지자체로 이양해야 한다. 중앙정부 업무를 지방정부가 대신 제공하는 권력 위임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방정부가 독립적으로 법을 만들고, 재원을 징수하고, 행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력 이양의 범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중앙에 집중된 정당 권력 또한 지역 정당으로 이양해 다양하고 복잡한 유권자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위기 원인은 전환 시대라는 구조적 변화에 있다. 수명을 다한 옛것을 버리고 전환 시대에 맞는 새것을 찾을 때 비로소 위기 탈출의 희망을 볼 수 있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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