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기생충’(2019) 이후 연기 인생 정점을 맞았던 배우 이선균이 27일 오전 서울의 한 공원 인근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48세.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그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자 워싱턴포스트·ABC·CNN·가디언·BBC·로이터 등 외신은 일제히 그의 부고를 다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은 “한국 연예계가 K팝 가수, 영화배우들의 마약 스캔들로 뒤흔들렸다”며 한국의 강도 높은 마약 정책을 주목하기도 했다. CNN도 이날 “‘기생충’ 배우 이선균 숨진 채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이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BBC 역시 이 같은 내용을 전하며 지난 10월부터 조사를 받아 온 그의 마약 투약 혐의를 자세히 다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1기인 그는 1999년 비쥬의 뮤직비디오 ‘괜찮아’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뮤지컬 ‘록키호러쇼’(2001)로 연기 데뷔, MBC 시트콤 ‘연인들’(2001)로 TV에 진출한 뒤 MBC 의학 드라마 ‘하얀거탑’(2007), 특유의 ‘동굴 목소리’를 유행시킨 MBC 로맨스물 ‘커피프린스 1호점’(2007), ‘파스타’(2010) 등 숱한 드라마 히트작을 냈다. 특히 가수 겸 배우 아이유와 호흡을 맞춘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선 중년 가장의 쓸쓸함을 연기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편안함에 이르렀나?” 등 무수한 명대사를 낳았다.
영화에선 ‘밤과 낮’(2008),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 등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출연해 해외 영화제에 얼굴을 알렸다. 스릴러 영화 ‘끝까지 간다’(2014)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공식 초청됐다. 5년 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대저택에 사는 박 사장 역을 맡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미국 아카데미 4관왕 등을 휩쓸며 글로벌 스타로 떠올랐다. 올해 칸 영화제엔 신인 유재선 감독의 공포 데뷔작 ‘잠’, 재난영화 ‘탈출: PROJECT SILENCE(프로젝트 사일런스)’ 등 2편의 주연작으로 초청되며 전성기를 맞았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이선균은 작품 감식안이 좋고 기본기가 탄탄해 쓰임새가 많은 배우였다”면서 “‘기생충’만 해도 개성 강한 배우들 사이에서 오만하지만 ‘리스펙’의 대상이 될 만한 자본가 캐릭터를 잘 전달했다”고 분석했다. 함께 작업한 감독들의 신뢰 또한 컸다. 봉준호 감독은 ‘잠’에서 수면 중 괴이한 행동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남편 역으로 “다양한 연기가 가능한 배우”를 찾던 유재선 감독에게 직접 이선균을 추천했다.
이선균은 새로운 작품을 직접 개척하기도 했다. 그가 “요상한 대본이 재밌어서” 출연한 잔혹 로맨틱 코미디 ‘킬링 로맨스’는 올해 관객 수 19만 명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지만, 컬트 팬덤을 낳았다. 백은하 배우연구소장은 “이선균과 함께할 때 상대 배우들은 최고의 커리어를 맞이했다”면서 “‘킹메이커’이자 ‘퀸메이커’였던 이선균의 작품 스타일이 최근엔 변화를 맞았다”고 짚었다.
이선균은 결혼 14년 차 아내인 배우 전혜진과도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모범적인 가장 이미지가 강했던 그였기에 유흥업소 마약 투약 혐의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영화 ‘탈출’과 ‘행복의 나라’ 등 개봉 대기 중이던 신작들은 마약 문제가 불거진 뒤 공개 일정을 잡지 못한 채 그의 유작이 됐다.
이씨의 비보가 전해지자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인 영화계는 이날 예정된 주요 행사나 인터뷰 일정이 줄줄이 취소됐다. 또 이씨의 팬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자신의 SNS에 “마약 투약 사실 여부를 떠나 이씨의 극단적인 선택에 충격을 받았고 너무 안타깝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