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한 해 마지막 주를 보내는 방법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에 있다. 옛 해는 끝나가는데 새해는 아직 오지 않은 어정쩡함에 마음이 괜히 더 부산하다. 하던 일을 잘 마무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새 일을 시작하기엔 이른 듯한 모호한 상태다. 이 시기를 작가 자카리아스 하이에스는 ‘문턱의 시기’라 불렀다. 이 기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갈 수도, 유의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유럽에선 크리스마스 이후 신년을 맞이할 때까지의 나날을 중요시했다. 나라나 지역마다 이 기간을 부르는 명칭도, 지키는 날수도 달랐지만 사람들은 이 시기를 삶을 점령한 분주함과 긴장에서 물러나 쉼과 여유의 때로 삼았다. 하던 일을 끝냈을 수도 있고 일이 덜 마무리됐을 수도 있지만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대함으로 시간을 채웠다.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한계마저 느긋이 바라볼 정도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던 강박을 내려놓으면서 잔잔하게 밀려오는 해방감도 덤으로 맛보았다.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태도가 가능하겠냐고 까칠하게 반응하지 말고 물러남과 휴식이 삶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느긋하게 상상해보자. 고대부터 종교는 익숙하게 느끼던 시·공간을 따로 떼어냄으로써 일상 한가운데서 초월을 경험하는 계기를 열어줬다. 예를 들면 ‘성전’을 뜻하는 영어 단어 ‘temple’은 경계가 쳐진 제한된 구역을 뜻하는 라틴어 ‘templum’에서 나왔다. 농사를 짓거나 거주지가 될 만한 땅에 경계를 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 땅은 사용과 쓸모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대신 그 땅은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채워질 수 없는 신비의 영역, 즉 은총이 부드러이 지탱해 주는 영역이 삶 속에 있음을 상기하는 공간이 됐다.
땅을 구별할 때와 비슷하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경계를 만들어주면 시간에도 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시간의 특정 구간을 따로 떼어내 그 시간을 생산에 쓰지 않을 때 여가와 쉼의 기간이 선별된다. 이러한 멈춤의 시간 속에선 무언가 소유하고 성취하겠다는 욕망을 렌즈 삼아 하나님과 세상을 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시간을 붙잡을 수도, 정복할 수도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시간의 흐트러짐 속에서도 우리를 받치고 있는 창조 세계와 그 속의 사물을 재발견할 기회도 얻는다.
일상의 분주함과 강렬함에서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의식과 근육 속에 흔적처럼 남은 피곤함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도 얻는다. 일할 때 누적되는 피곤과 달리 쉼의 순간 자각되는 피곤은 우리의 존재가 가치 있고 삶이 의미 있음을 느끼게 도와준다. 이러한 만족감과 노곤함이 혼합된 상태를 만화가이자 시인인 마이클 류닉은 ‘고상한 피곤’이라 불렀다. 고상한 피곤이야말로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휴식과 안정이라는 선물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케 하는 소중한 느낌이다. 이러한 피곤에 우리는 지금껏 누리던 것에 ‘충분하다’라는 느낌을 더함으로써 세상을 감사와 흡족함으로 대할 능력도 기르게 된다.
물론 현대 사회는 우리가 ‘해와 해 사이의 날들’에 자신을 채근하며 2023년 남은 시간을 최대한 끌어 쓰도록 압박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크리스마스와 신년 사이 6일을 앞선 359일과 똑같이 보내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이 기간을 삶에 더 많은 여백을 마련해주고 불필요한 말을 줄이며 몸과 마음에 충분 휴식을 부여할 수도 있다. 발걸음을 천천히 하고 나와 남을 탈진시키는 호기심도 누그러트리는 기간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의도된 느긋함 속에서 나와 너의 연약함과 한계를 존중하고 우리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분에 대한 믿음 안에서 현실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며 새해를 기다리길 소망한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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