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력 합계 220년’ 배우들의 힘…난해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김서원 2023. 12. 28.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로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이 이어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사진 왼쪽), 박근형(사진 오른쪽),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 등 출연진 다섯 명의 연기 경력을 합치면 220년이 넘는다. [사진 파크컴퍼니]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방랑자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맥락을 알 수 없는 둘의 대화는 극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별다른 내용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만 반복한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와 바위 하나뿐인 황량한 시골길에 두 방랑자가 등장하며 극은 시작한다.

원로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이 이어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 박근형, 박정자(사진), 김학철, 김리안 등 출연진 다섯 명의 연기 경력을 합치면 220년이 넘는다. [사진 파크컴퍼니]

이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동을 계속하며 고도를 기다린다. 배고프다며 “당근을 달라”는 고고에 디디는 순무를 건네고, 심심하니 “서로 욕지거리나 하자”며 싸우다가도 금방 화해한다. 바지 끈으로 목을 매 죽어야겠다고 실컷 얘기하지만 정작 바지가 흘러내려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기다려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한 소년이 관객석을 가로지르며 이렇게 말한다. “고도씨는 오늘은 못 오시고 내일 꼭 오신대요.” 절망에 빠진 그들은 손을 뻗지만, 소년은 홀연히 사라진다.

프랑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없는 기다림 속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에 관한 이야기다. 관객은 고고와 디디의 만담 같은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삶의 허무함을 얘기할 땐 이내 숙연해진다. “웃고 있어도 슬퍼진다” “기다림과 갈망 끝에 오는 좌절이 쓸쓸하다” 같은 관객 평이 쏟아지는 이유다.

원로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이 이어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사진), 김리안 등 출연진 다섯 명의 연기 경력을 합치면 220년이 넘는다. [사진 파크컴퍼니]

대체 고도는 무엇이며, 그들은 왜 이토록 고도를 기다릴까. 1953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자유’ ‘희망’ ‘구원’ ‘죽음’ 등 전 세계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공연됐다. 하지만 아무도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원작자 베케트조차 “나도 고도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으니 말이다. 국내에서는 1969년 초연한 이후 1500회 이상 무대에 올려졌다. 누적 관객만 22만 명이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오경택 연출가는 “끊임없이 얘기와 행위를 하던 두 사람은 가끔 무엇을 말할지 또는 행동할지 모를 때 침묵한다”며 “침묵은 인식이 이뤄지는 순간이고, 그 순간 그들은 고통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는다”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침묵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맥락이나 의미 없는 말과 행위를 다시 한다”고 설명했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부조리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원로배우들의 연기에서 나온다. 62년 차 배우 신구(87)가 고고, 61년 차 배우 박근형(83)이 디디 역을 맡았다. 신구는 급성 심부전증으로 심장박동기를 착용하고도 큰 소리로 빠른 호흡의 대사를 쏟아냈다. 박근형도 8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지친 기색 없이 공연장 곳곳을 누볐다. 연기 경력을 모두 합쳐 220년이 넘는 원로 배우들의 열연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기 내공이 느껴진다” “극에 집중하게 만든다” 등 호평도 이어졌다. 배우들은 2개월 동안 캐스팅 변경 없이 모든 회차에 출연한다. 공연은 내년 2월 18일까지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