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만나요
요즘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전시 소식을 자주 듣는다. ‘어떤 전시에 갔는데 사람이 많더라’ ‘어떤 전시가 볼만하더라’.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말 오후가 되면 SNS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린 전시를 배경으로 지인들의 사진이 도배된다. 전시의 인기를 체감하는 건 업무용 캘린더를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패션과 워치, 주얼리 브랜드와 함께한 전시 소식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늘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전시를 일상적으로 즐기게 됐을까? 의문이 생긴다. 돌이켜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전시에 가는 일이 꽤 특별한 일정 중 하나였다. 좋아하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거나, 여행지 속 유명 미술관을 찾으면서 접하는 콘텐츠가 전시였다. 이제는 전시를 향하는 발걸음이 보다 가벼워졌다. 우리는 마치 동네 맛집을 찾듯 전시를 찾는다. 전시 관람 인구가 늘었다는 사실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한 해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관람자가 2021년에는 165만 명, 2022년에는 282만 명으로 늘었고, 2023년에는 상반기에만 무려 151만 명이 다녀갔다. 주목할 만한 점은 관람객 대부분이 2030세대라는 것. 국립현대미술관에 따르면 2023년 관람객 중 20대는 37%, 30대는 26%로 관람객의 63%가 2030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젊은 세대가 전시에 모여드는 이유는 뭘까? 언론은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팬데믹을 꼽았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생활이 셧다운을 겪어야 했던 팬데믹 동안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 머물며 넷플릭스와 메타버스 같은 간접 경험으로 문화 향유 욕구를 대리 만족하며 버텼다. 팬데믹이 끝남과 동시에 억눌렸던 욕구는 폭발했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전시를 통해 현실로 반영됐다. 그뿐 아니라 전시가 ‘인스타그래머블’한 콘텐츠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SNS를 활발하게 활용하는 젊은 세대에겐 모든 일상이 ‘인증샷’의 대상인데 전시공간에서 손쉽게 ‘인생샷’을 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점을 간파한 전시 주최 측은 관람 동선 사이사이에 매력적인 포토 존을 배치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배경과 조명까지 세밀하게 조율한 포토 스폿에서 건진 누군가의 인생샷은 SNS를 타고 널리 퍼져 또 다른 관람객을 불러모으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파급력이 큰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의 활약도 전시 흥행에 영향을 준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BTS 멤버 RM이 다녀가는 전시는 수많은 아미의 행렬이 뒤따르며 화제의 전시로 떠올랐고, 2022년 처음 열린 아트 페어 프리즈 서울은 지드래곤 · BTS 뷔 · 이정재 등 수많은 셀럽이 찾으면서 이들의 목격담과 함께 온라인으로 바이럴됐다. 그뿐 아니다. 전시 인기 요인에는 MZ세대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드는 ‘가성비’도 한몫한다. 고물가 시대에 치솟는 문화생활비 속에서 전시만큼은 여전히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년간 영화 티켓의 가격 변화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문화생활비가 얼마나 큰 인플레이션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은 영화관은 그동안 세 차례나 가격 인상을 단행했고, 콘서트나 뮤지컬 같은 문화생활의 가격도 훌쩍 올랐다. 그에 비해 전시는 거의 무료입장이거나 1만 원 안팎의 가격으로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전시가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관람객의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전시 필드에 새로운 변화도 감지된다.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열리면서 문턱이 낮아지고 있는 것. 대표적 예가 얼마 전 열린 악동 뮤지션 이찬혁의 전시다. 〈영감의 샘터〉라는 이름의 이 전시에는 이찬혁의 코믹한 사진부터 직접 메모한 글귀, 여러 설치미술 작품이 어우러져 SNS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반드시 예술작품만 전시 대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 이제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다면 전시 주제가 될 수 있는 시대다. 바로 이 지점이 요즘 패션 하우스가 전시에 뛰어드는 포인트다. 하이패션과 워치, 주얼리를 다루는 럭셔리 하우스에 스토리텔링은 생명력과 같다. 얼마나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가 하는 것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물건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의 손을 거쳤느냐 하는 이야기가 브랜드 가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세대의 헤리티지를 고루하다고 여기는 지금의 영 제너레이션에게 럭셔리 하우스는 다음 세대와의 진정성 있는 미래를 위해 자신의 브랜드를 설득시켜야 할 이유가 있다. 특히 억 소리 나는 초고가의 시계나 주얼리 브랜드에 있어 전시는 더더욱 중요하다. 가치에 기반한 높은 가격을 납득시키려면 제품 품질뿐 아니라 전통과 역사, 문화 가치를 전달해야 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지 고민일 수밖에. 트렌드에 관심 많은 젊은 세대는 주입식으로 느껴지는 광고 대신 쉽고 재미있게 브랜드 히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한 전시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 덕분일까. 요즘 패션과 워치, 주얼리 하우스의 국내 홍보팀은 전시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는 분위기다. 하우스 본사가 있는 유럽부터 수백, 수천 개의 아카이브를 공수하는 건 물론 그 모든 물건을 디스플레이하는 것까지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동원한다. 오직 사람들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다. 전시를 찾는 이도, 전시를 여는 이도 많아진 전시 시대. 쏟아지는 전시 속에서 삶의 영감이 되는 물건을, 또는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그만큼 값진 경험이 있을까. 다양한 방식의 전시와 그 속에 녹아든 패션 스토리를 더없이 기다리는 이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