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76년 된 그 소아과 문 닫더니, 경북 청도군으로 간 사연

백경서 2023. 12. 27. 13: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진오(75) 전 정소아과의원 원장이 지난 9월부터 청도군보건소에서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보고 있다. [사진 청도군보건소]

“저출산 극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 문을 닫고 청도군보건소로 오게 됐습니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청도군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소아과전문의 정진오(75)씨가 2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정씨는 지난 9월부터 이곳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청도군보건소는 경북지역 23개 시군 보건소 가운데 유일하게 소아청소년과를 운영하고 있다. 청도군보건소는 지난 7월 전문의 모집 공고를 냈는데 정씨 혼자 지원했다고 한다.

민간 산부인과·소아과 없는 청도군
청도군에는 출산이 가능한 민간 산부인과나 어린이 진료가 가능한 소아과 의원이 한 곳도 없다. 청도군보건소 관계자는 “2016년부터 보건소에 출산 관련 진료를 볼 수 있는 청도외래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는데 분만은 불가하다. 그간 지역사회에서 소아과라도 열어 달라는 목소리가 컸다”며 “(정 전 원장이) 청도로 와주셔서 많은 주민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구 중구 진골목 정소아과의원. [사진 정소아과의원]

정씨는 청도군보건소에서 월·목 등 주 2회 진료한다.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는 6~9명이다. 진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그는 “환자 부모가 이제 대구나 경산까지 가지 않아도 돼서 고맙다고 하신다”며 “그간 소아과가 없었으니 물어볼 데가 없어서 한번 오시면 이것저것 묻고 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경희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그는 3개월 전까지 대구 중구에 있는 ‘정소아과의원’에서 소아과를 운영했다. 정소아과의원은 1947년 대구 지역 최초의 서양식 민간주택에 들어선 의원이다. 정씨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 건축물은 당시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정씨는 “청도군군보건소로 왔는데 개인병원 겸직은 안 된다고 해서 폐업했다”며 “지역 사회에 공헌하자는 생각에서 잠시 중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진골목의 상징 ‘정소아과의원’

대구 중구 진골목 정소아과의원. [사진 정소아과의원]

정소아과의원은 대구 중구 진골목의 상징 건물이다. 이 골목에는 1930년대 대구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과 방계형제인 서병직 등이 모여 살았다. 37년 지은 정소아과의원 건물은 연면적 634㎡ 규모에 정원까지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서병직이 살다가 정 원장의 아버지인 고(故) 정필수 원장이 47년 매입해 문을 열었다. 2층은 병원, 1층은 살림집이었다. 정필수 원장이 62년간 진료했고, 그가 90세가 되던 2009년 한차례 문을 닫았다.

정필수 원장은 2009년 지역 언론과 인터뷰에서 “40~60년대엔 애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병원을 찾았다. 전염병이 돌면 온종일 물도 한 모금 못 먹고 일했는데 진료를 하려고 보면 죽어 있는 애들도 있었다. 바로 돌아서서 다른 환자를 봐야 하니 가슴 아플 새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정소아과의원으로 돌아온 맏아들


대구 중구 진골목 정소아과의원의 내부 모습. [사진 정소아과의원]
2017년 정필수 원장이 작고한 이후 맏아들인 정씨가 이듬해 다시 개원했다. 정씨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인 만큼 아버지 뒤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주변에 약국이 없어 처방전을 발급할 수 없었고, 이에 인근 주민을 대상으로 예방접종을 하는 수준으로 운영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구 근대 역사를 담고 있는 건물인 만큼 상황이 되면 돌아가서 다시 문을 열 생각이 있다”라고 말했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