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딜쿠샤’, 친절한 금자씨 [홍종선의 신스틸러➃]
사직터널 위에 있는 낡은 집에 얽힌 한국의 근현대 역사가 다큐멘터리 ‘희망의 궁전, 딜쿠샤’(2013)가 되고, 다큐멘터리가 다시 뮤지컬 ‘딜쿠샤’가 되어 국립정동극장에서 관객의 마음에 ‘난로’를 들여놓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미국인 남편 알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아내 메리 I. 테일러에 의해 1923년 지어지기 시작해 1924년 완공한 인왕산 자락 은행나무 옆 붉은 벽돌집은 25년은 부부와 아들 브루스의 보금자리였고, 가족이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뒤에는 북에서 내려오거나 가난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많게는 16개의 작은 안식처를 제공했으나 대한민국에 ‘갈아엎는’ 개발 광풍이 불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마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어머니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했고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딜쿠샤를 2006년 브루스 테일러가 방문하고, 가난한 이들이 ‘희망’으로 지켜내던 딜쿠샤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도움 속에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되면서 철거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1917년 메리와 알버트가 우리나라에 입국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에 전해진 소식이었다.
딜쿠샤, 알버트와 메리가 결혼한 인도에서 보았던 궁전의 이름,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이름 그대로, 100그루의 복숭아나무와 한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던 붉은 벽돌집 딜쿠샤는 이제 전시관이 되어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다.
실화에는 힘이 있다. 이 정도에서 그치는 이야기였다면 다큐멘터리로, 뮤지컬로 확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기막힌 사연들은 상상 그 이상이다.
하나의 집이 100년을 버티며 품어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바랐던 꿈과 지키고 싶었던 희망은 작품을 통해 만나볼 가치가 있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쓰인 독립선언문이 딜쿠샤 부부와 갓 태어난 알버트의 강보에 가 닿는 것은 놀랍고, 평생을 딜쿠샤와 함께한 산증인 금자를 중심으로 전쟁과 화마를 둘러싼 이름 없는 이들의 사연과 평범한 일상 이야기는 자못 감동적이다.
뮤지컬 ‘딜쿠샤’(예술감독 양준모, 작 김세미, 연출 이종석)의 가장 큰 미덕은, 그래서 공연이 지속되고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고 생각하는 이유는 공연 자체에 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한파에 찢긴 채 공연장에 들어가도 좋다.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듣고, 아니 배우들의 표정만 보아도 저 멀리 꽁꽁 언 발끝부터 녹기 시작한다. 점점 공연장 온도를 높이고 공기를 데우던 ‘딜쿠샤 난로’가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와 앉아 있다. 마음속이 뜨끈해지고 훈훈한 기운이 뇌까지 번진다.
참 특별한 뮤지컬이다. 무대장치나 의상을 설명하거나 노래들을 소개하거나 배우들 연기를 칭찬하기보다 ‘덩어리’로 다가와 보는 이를 치유하는 그 ‘힐링’을 어떻게든 잘 전하고픈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글재주가 부족해 직접 보시면 좋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뚜렷한 세 가지 정도는 졸필로나마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엔 딜쿠샤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내가 ‘문턱’ 없이 딜쿠샤 이웃이 되어 함께 앉아 있다. 객석과 무대가 분리된 게 아니라 내가 앉은 곳도 딜쿠샤 안이 된다. 1955년 이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열린 공간이 되어왔던 국립정동극장 공연장이 고스란히 딜쿠샤로 다가온다.
두 번짼, 정동 딜쿠샤에서 뮤지컬 ‘딜쿠샤’가 공연되는 것 같은 느낌 속에, 스스로 따스한 난로가 되어 그 공간에 온기를 더하고 세피아 톤의 빛을 뿜어내며 딜쿠샤를 물리적 집(house)이 아니라 홈(home, 가정이라고 해야 할까)으로 느끼게 하는 이들이 있다. 예술감독 이하 모든 제작진의 노력이겠으나 그 생각과 마음을 관객에게 전하는 우체부, 배우들이다.
최인형, 하은섬, 김현숙, 임강희, 조영태, 이성주, 이유리, 한상호, 손지원, 박소은, 이지수, 김지훈. 어느 공연에서도 보기 힘든 마음의 화합. 한 무대에서 연기하는 동료애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가족애처럼 다가올 만큼의 끈끈한 무엇이 배우들의 연기를, 작품의 요소요소를 ‘유기적으로’ 뭉쳐낸다.
세 번째는, 작품을 보다 문득 깨닫게 되는 사실인데. 서양인들에 의해 지어진 집임에도 딜쿠샤가 금자 씨로, 금자 씨가 딜쿠샤로, 두 존재 사이에 ‘등호’가 그려진다. 뮤지컬 ‘딜쿠샤’에는 젊은 금자 씨, 중년의 금자 씨, 생의 끝자락에 선 금자 씨가 등장한다. 동생뻘 명자 씨부터 사회초년생 봉순이, 북파 켈로부대 요원 강철 씨로부터 넝마주이 동팔에 노래하는 써니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품어내는 게 친절하다 못해 푸근한 금자 씨다.
왜일까, 왜 테일러 가(家)의 집 딜쿠샤가 이름도 외국어인 딜쿠샤가 금자 씨 자체로 느껴졌을까. 가장 오래 딜쿠샤를 지켜서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꼭 돌아가고 싶은 곳, 그곳이 우리집일 수도 엄마의 품일 수도 떠나온 고향일 수도 머나먼 조국일 수도 있는 그곳에 언제나 금자 씨가 ‘천진난만한’ 미소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선지 뮤지컬에는 ‘어린 금자’가 없다. 딜쿠샤처럼 한 세기를 살아가는 할머니 금자 씨에게는 우리가 잊다 못해 잃어버린 ‘동심’이 여전히 간직돼 있고, 덕분에 우리는 주뼛거릴 필요 없이 그곳, 딜쿠샤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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