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월간 옥이네 2023. 12. 2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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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메고 들어와 면도칼로 쓱싹하면 끝... 옥천에서 볼 수 있는 '노란 시트지' 이야기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의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재미난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물결치는 듯한 곡선의 조화와 삐침이 인상적인 글씨체의 간판이다.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의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재미난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물결치는 듯한 곡선의 조화와 삐침이 인상적인 글씨체의 간판이다. 얇디얇은 시트지를 조각칼로 그어낸 것이기에 요즘 간판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오래된 향수를 자극하는 글자들. 제작가를 알리는 표식은 없지만, 특유의 글씨체가 같은 이의 손에서 탄생했음을 쉬이 짐작하게 한다.

과거에는 기계 출력이 아닌 사람은 손에서 탄생하는 시트지 간판이 더 익숙했을 테지만, 이제 와선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풍경. 이제는 잊혀 가는 풍경을 골목 구석구석 남겨둔 이 독특한 서체의 주인공은 누굴까.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타난 할아버지

"아, 유리창에 있는 전화번호 시트지요? 그거 길 가던 할아버지가 해주신다고 해서 한 거예요. 작업한 지 4년쯤 됐나. 추워지면 시트지가 잘 안 붙는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인 4년 전 가을이었던 것 같네요."

여느 때와 다름없던 가을날, 낯선 이가 옥천읍 '예쁜꽃집'의 문을 두드렸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가게에 들어선 그는 대뜸 시트지 간판을 제작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란다. 1만 원에 원하는 시트지 간판을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차양을 설치하느라 간판에 전화번호를 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예쁜꽃집 이명순 대표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충북 옥천 예쁜꽃집 외부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예쁜꽃집에 붙은 시트지
ⓒ 월간 옥이네
 
"도안도 없이 쓱싹쓱싹 손을 움직이시더니 금방 시트지를 붙이시더라고요. 어르신 덕분에 전화번호 붙여서 좋았죠. 전화번호 시트지 옆을 구름 모양으로 꾸며주셨는데, 작업물이 꽤 마음에 들었어요."

짧은 작업시간 동안 무료함을 달랠 겸 나눈 대화에서 그가 대전에서 오래 간판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옥천까지 왔다가 돌아갈 때도 버스를 탈 예정이라는 말에 웃돈을 얹어 작업비를 드렸다.

이명순 대표는 작업을 끝내고 돌아가는 어르신께 "옆 골목 정류장에서 대전 가는 버스를 타실 수 있다"고 안내까지 했다지만 그는 대전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던 듯싶다. 옆 골목으로 가는 길에 놓인, 이제는 영업을 중단한 오래된 맥주 가게에도, 옥천군보건소 앞 미용실(옥천읍 삼양리)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예쁜꽃집: 옥천군 옥천읍 중앙로 3

"청산에 또 안 오시나 몰라"

옥천읍 예쁜꽃집에서의 목격담보다 1~2년 전정도 앞선 것으로 추측되는 시점, 그가 배낭을 어깨에 메고 청산면에 등장했다. 이번 목격담에선 하얀 개량한복을 입었다는 그다. 청산면에서 가장 번화한 사거리에 있는 '365 토탈세탁'이 그가 목격된 장소.

365 토탈세탁 이희구 대표는 "유리창 선팅 안 하실래요?"하는 그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시골에서 장사하면 수입도 많지 않은데, 쓸데없는 지출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 하지만 "밥 먹을 돈도 없다"는 그의 말에 단호했던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밥 먹을 돈도 없다는데 어떡해. 그냥 해달라고 했지, 뭐." 수락이 떨어지자 '어떻게 작업해 드릴까요'라는 흔한 질문도 없이 작업이 시작됐다. 그는 시트지를 유리창에 붙이고, 작은 면도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뒤로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시트지를 붙이고선 면도칼로 사사삭 선을 내는데, 순식간에 글씨를 만들더라고. 움직임이 꼭 볏단 자르는 검술을 보는 것 같았어. 손끝이 장난이 아니셨지. 내가 직접 하라고 하면 한참 걸릴 일을 그분은 너무 쉽게 하는 거야. 신기했지."
 
 옥천 369토탈세탁 외부
ⓒ 월간 옥이네
 
 옥천 369토탈세탁 유리에 붙은 시트지
ⓒ 월간 옥이네
 
이전에 붙어있던 시트지 색이 빨간색이었던 터라 같은 색을 기대했던 이희구 대표는 작업이 끝날 즈음 노란 글씨가 붙은 유리창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노란 간판이 낯설었지만, 묘한 느낌이 있는 필체가 마음에 들었다고.

"작업하고 나서 보니까 필체가 특이하고 멋있어서 마음에 들었어. 청산에 또 찾아오시면 한 번 더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 뒤로는 청산에 안 오신 것 같아. 오셨으면 우리 집 또 들렀겠지. 요즘은 어디서 뭐 하고 계실지 모르겠네."

이희구 대표는 오랜 기억 속 그를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낡은 하얀 옷에 큰 배낭을 걸쳐 메고 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도인 같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점심 무렵 등장해 밥값이 없다며 토탈세탁의 시트지 간판을 새로 판 그는 수고비로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었을까. 아니면 곧장 다른 곳으로 훌훌 떠났을까.

* 369 토탈세탁: 옥천군 청산면 지전길 4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오래돼 빛바랜 기억의 공통점은 바로 그가 대전에서 왔다는 것. 대전 중구의 한 가게에서도 그의 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게 앞 시트지 간판 해주신 분이 삼정동(대전 동구)에 살던 분인데, 간판이랑 광고 일 오래 하던 분이에요. 그분은 전화번호도 없어. 그냥 가방 메고 나그네처럼 다니면서 시트지 글자 붙이고 사셨죠."

드디어 그의 행적을 찾았다 싶은 찰나.

"요즘 거리에 나타나지도 않고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있어요. 연세가 많은 분이라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근데 또 모르죠. 이 동네 떠나서 딴 동네 돌아다니고 있을지..."

역마살이 있어 그런지 떠돌아다니는 일을 하게 됐다고. 그렇게 이름도, 명함도 없이 "내 발이 닿는 대로 다닌다"던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옥천의 한 가게에 붙은 시트지
ⓒ 월간 옥이네
 
* 월간옥이네는 이 서체의 주인공을 아시는 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 043-732-8116

월간옥이네 통권 78호(2023년 12월호)
글·사진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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