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극사실화 고집한 작가, 묘사력에 감탄하는 이유

김형순 2023. 12. 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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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작가 개인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내년 1월 28일까지

[김형순 기자]

 '이광호'전이 열리는 삼청동 국제갤러리 K1 전시장 입구
ⓒ 김형순
 
조선 시대, 꿩의 색채와 깃털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을 '치도(雉圖)'라 했다는데 한국의 대표 극사실화가 이광호는 그런 화풍이 연상된다. 그의 개인전 '확대(BLOW-UP)'가 국제갤러리 본관(K1)에서 내년 1월 28일까지 열린다. 여기에 9년 만에 대형 퍼즐처럼 보이는 60개로 '구획된 회화'를 들고 나왔다. 세밀한 구상을 확대해 그렸는데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번 작품은 이광호 작가가 2017년 뉴질랜드 여행 중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인근에서 우연히 발견한 늪지에 매혹되어 찍은 사진을 근간으로 작업한 것이다.

작가는 습지 주변의 분위기와 그곳의 대상물과의 내밀한 대화를 통해 얻은 영감을 캔버스 위에 담았다. 국제갤러리 K1 메인 전시 벽면을 꽉 채워 장엄한 분위기를 낸다. 구상화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실험적 풍경이다. 그런데 관객에게 묘한 황홀감을 준다.
 
 이광호 I '무제(1304)' 캔버스에 유채 173×150cm. 2014년에 국제갤러리에 출품작
ⓒ 김형순
   
이번 전시는 지난 2014년 국제갤러리 제주 덤불숲 '그림풍경전'을 연상시킨다. 인적 끊어진 버려진 이 숲,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곡선으로 뒤엉킨 마치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 풍경과 발버둥 치는 원시적 생명력을 대조시켜 큰 공감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도 그런 분위기의 연장이다. 다른 점은 이번에는 60개 구획된 대형 풍경화라는 점이다.

이광호 작가는 어느덧 화력 40년, 그 동안 극사실화를 그려왔다. 위 작품을 그랬지만, 극사실 화가로서 가는 바람에도 휘날리는 세밀한 붓 터치, 그 묘사력이 감탄스럽다. 하긴 그는 회화적 기법들을 주로 광범위하게 섭렵해 왔다. 그런 그의 구상이 확대되다 보니 이번엔 인상파 모네의 '추상효과'를 보이는 건가. 회화의 본질로 들어가면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없어지나 보다. 

그런데 이런 그가 뜻밖에 회화의 '기법'보다 '매너'가 더 중요하다고 하니 당황스럽다. 작가의 미학에 깊이가 더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작가의 주제가 아직도 '붓질'연구인 것은, 그만큼 회화의 길에는 끝이 없다는 소리다.

눈을 손처럼 사용한다는 작가
 
 이광호 I '무제 시리즈(Untitled 4819)' 부분화 60개 각 크기 90×81cm 2023. 한 작품은 숨구멍을 내듯 빼서 59개다.
ⓒ 김형순
그렇다면 작가에게 '매너'란 뭔가? 이건 작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그려내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유성을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이걸 소설가로 치면 '문체'이고 가수로 치면 '음색'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로서 내면에 나오는 자부심으로서의 붓질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며 작가는 이제 회화를 더 확대(Blow-up)해서 다르게 해석하고자 실험 중이다. 그 내용보다는 관객의 오감 속으로 파고드는 '시각적 촉각미'를 끌어내겠다는 야심이리라. 그림에 멋보다는 맛을 내려고 한다. 결국, 자기만의 붓질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작가는 "나는 손을 눈처럼 사용해 그린다"라고 말한다. 그는 손으로 갖가지 기교를 구가하지만 결국 거기에 자신만의 시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래야 자신만의 창작에 몰입할 수 있고 무념무상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제대로 예리하게 보게 되나 보다. 사실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그건 의식보다는 무의식 세계에 가깝다. 열정적이고 집중적인 관찰 후에 따르는 열매인지 모른다. 감상자에게 아부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과 혼연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작가의 몸부림이리라.
 
 국제갤러리 전시장 내부 풍경 60(-1)개로 구획된 '무제' 시리즈 작품 2023. 오른쪽 상단을 보면 한 작품이 없다.
ⓒ 김형순
   
사실 그도 작업에서 얽히고설킨 물풀과 꽃, 이끼, 물웅덩이의 요소가 두루 넓게 펼쳐진 형식으로 화면을 채워가면서 작품에 호흡을 불어넣기도 하고, 캔버스 천을 직접 만든다거나 다양한 바탕칠을 실험하면서 물감의 흡수력을 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회화에는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계적 심혈보다는 즉흥적 몰입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우연성이 유발되면서 구상적 접근임에도 붓질이 자신도 모르게 현란해지면서 추상적 양상을 띠게 되고, 붉고 습한 이끼들이 더 추상화되는 모양이다. 관객과 더 소통하면서 상호교감의 폭을 넓게 가려는 듯. 그게 화가로서의 바른 예의고 몸가짐이고 거기에서 창작의 의미와 가치가 두고 있는지 모른다.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60개 작품 중 한 작품을 뺀 것은 일종의 숨구멍을 내고 관객에게 상상적 호기심을 주려 한 듯하다. 모두가 왜 그림 하나가 없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 작품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한 작품이 어딘가 다른 공간에 연결돼 있다는 암시를 준다. 여기 큰 전시실에서 작은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아래에 보이는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장소가 다른 두 곳의 독립된 작품이 마치 하나의 몸통으로 작용한다고 할까? 두 곳이 합쳐져서, 전체가 하나의 악보로 어우러지는 협주곡으로 연주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이광호 I '무제 시리즈 4819-62(Untitled 4819-62)' 캔버스에 유화 170×150cm 2023. 멀리서 보면 구상 가까이서 보면 추상같다.
ⓒ 김형순
이 작가는 극사실 화가로 물감을 묽게, 거칠게, 때로는 밀랍으로 흐리게 칠하는 섬세한 묘사에 애착을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 더 중요한 건 역시 "더 잘 칠하는 것이다"라고. 색채를 우선으로 치는 페인팅 화가답다. 이게 위에서 말한 '기술'보단 '매너'에 더 가치를 둔다는 맥락이리라. 그냥 '재현'이 아니라 '시선의 재현'으로 진정한 시각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본 전시 제목 'Blow Up'은 196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이탈리아 명감독 'M. 안토니오니(M. Antonioni)'이 연출한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이 영화는 틀에 박힌 시선 욕망에 담긴 허망함에 의문을 던졌다고. 이광호 작가는 그런 시도를 자신의 회화에 적용해 기존의 틀과 회화의 범위를 벗어나 완성도 높은 작품을 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이광호(1967년생)' 작가는 1994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조현화랑 '이광호'(2018), 국립현대미술관 '환영과 환상'(2015), 런던의 사치 갤러리 '코리안 아이'(2012), 서울시립미술관 '극사실화-눈을 속이다'(2011), 프라하 비엔날레(2009) 등 국내외 다수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항저우 바이아트매터스를 포함한 유수 기관에 소장됐다.

덧붙이는 글 |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https://www.kukjegallery.com/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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