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 영화'도 이 사람이 작업했을지 모릅니다

김은미 2023. 12. 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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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번역 : 황석희> ... 해외 영화 '말맛 살리기'에 필수인 이 직업

[김은미 기자]

▲ 책표지 번역 : 황석희
ⓒ 달 출판사
 
책의 제목보다도 작가의 이름을 부각시켜서 오히려 잘 팔리는 책들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적이다. 그런 면에서 <번역 : 황석희>라는 타이틀이 다소 모험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드풀 시리즈, 스파이더맨 시리즈, 보헤미안 랩소디 등 유명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영화 번역 분야에서는 '번역의 신(작가 본인은 매우 쑥스러워 하시는 별명이지만)'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이 사람. 그럼에도 책의 타이틀로 작가의 이름을 넣는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결론적으론 탁월했다.

책 <번역 : 황석희>의 번역가 황석희는 18년째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뮤지컬, 연극, 책 번역도 하지만 주로 영화 속 자막을 만드는 일을 한다. 자막은 영화의 장면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 번역과는 또 다른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야에 관련된 책이 희소한 가운데 이 책의 출간 소식은 매우 반가웠다.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번역과 닮아 있는 삶, 정역이 아닌 오역과 의역을 넘나드는 영화 번역가로서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에세이가 매우 흥미롭게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번역가거든요. 상대의 말은 물론, 표정과 기분을 읽어내 각자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도 번역이고 콧속에 들어온 차끈한 아침 공기로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죠. 그 과정에서 때론 오역을 하기도 하고 과한 의역을 하기도 해요." (7쪽)

번역의 참뜻, 뉘앙스 냄새 맡기

'번역'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옮김. 한자로는 '뒤집다'의 뜻이 있는 飜(번)과 '풀이하다'의 뜻이 있는 譯(역)의 조합'이다. 반면에 번역가 자신이 말하는 '번역'의 정의는 '문장이 아니라 뉘앙스를 옮기는 것, 경험을 근거로 문장이 풍기는 뉘앙스의 냄새를 맡는 것. 감독이 아닌 이상 정확한 뉘앙스를 알 순 없지만 정확에 근접한 뉘앙스를 포착해 내는 것(174쪽)'이라고 하니 이해가 쉽다. 단순 해석과 번역은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트렌드를 읽고, 시대를 반영한 단어와 문장을 골라내는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황석희 번역가 역시 번역의 과정에서 미처 수정하지 못한 오역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오역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번역가들을 주춤하게 한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은 단순히 무례한 게 아니라 과민해서 무례해진다. 자극에 과하게 민감하다. 그게 어떤 자극이든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는 자극이면 그냥 넘어가질 못한다. 반드시 시비를 걸어 싸우거나, 싸우는 게 피곤할 때라도 기어코 비아냥 또는 빈정대기라도 하고 지나가야 속이 편해(63쪽)'지는 사람들. 그런 이들 덕분에, 번역가의 삶 또한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을 묻자 '내가 번역한 영화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 줄 때가 아니라 관객들이 저렇게나 좋아해 주는 영화를 내가 번역했을 때 (112쪽)'이며, '누군가의 인생 영화, 누군가의 소중한 영화를 번역했다는 감사함과 뿌듯함이면 족하다(113쪽)'고 말하는 작가. 그의 겸손함이 오히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읽힌다. 영화 100편 중 99편에서 오역이 발견될 수 있지만, 오역의 개수로 번역가의 자질, 번역의 질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번역 비평을 위해서는 제법 깊고 복잡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당당함에서 번역가로서의 그의 철학 또한 엿볼 수 있다.

어떤 지면 인터뷰에서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로 남는 게 꿈이라며, 번역을 하면서 황석희라는 이름과 커리어 속에 채우고 싶은 단어들은 '성실, 꾸준, 개성, 발전'이라고 황 번역가가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태도가 그를 '무조건 믿고 보는 번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JTBC 드라마 <런 온>의 한 장면. 당시 극중 신세경(왼쪽)의 직업이 영화번역가였다.
ⓒ JTBC
한편, 지난 2020년 방영했던 드라마 '런 온'에서 배우 신세경이 맡은 배역의 직업이 '영화 번역가'였다고 한다. 드라마 런칭 기사를 보고 SNS에 '혹시 직업적인 조언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라'라는 글을 올렸고, 실제로 신세경 배우와 제작진들이 황석희 번역가의 집에 찾아와 디테일하게 취재를 해갔으며, 그 이후 드라마에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재현됐다는 에피소드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 드라마를 즐겨봤지만 신세경 배우의 작업실은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다시 한번 드라마를 찾아보고 싶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번역가 이름 때문에 영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니

나이듦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체적 징조는, 내게 있어선 '노안과 단어의 망각'이다. 작가 역시 40대에 접어들면서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이 길어지고 생각의 속도가 말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발생하는 병목 현상을 겪었다고 속상함을 토로한다. 번역의 과정에서도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며, 오랜 고민 후 해결책으로 찾은것은 '말의 속도를 생각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었다.

이건 번역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조금 느릴지라도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이해해주면 어떨까? 본인 스스로는 '느림'으로 인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해지고 정확한 의도 전달이 가능해졌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나이듦이 주는 조언'이라고 말이다.

엔딩 크레디트 속 번역가가 아닌, 그 너머에 있는 황석희 번역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다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어머니로부터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최고의 것은 아닐지언정 당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받으며 자랐고. 그 최선은 최고 못지않은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최고를 능가하는 값진 것이었다(225쪽)'는 작가의 고백은 번역가 황석희를 만든 원동력이 결국 '어머니'였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번역:황석희>는 에세이지만 인문학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번역을 '외국어 해석을 잘하는 일'이라 여기는 것만큼 큰 오해는 없다. 번역은 우리가 체험해 보지 못한 문화권의 시대적 특성, 유머와 온도 그리고 뉘앙스를 그대로 가져다 느낄 수 있게 옮기는 작업이기에 창작에 가깝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 어느 번역가의 참여만으로 영화에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김이나 작가의 추천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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