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요, 10년은 젊어지니까"라던 '버킨백' 그녀도 떠났다 [올해 진 별들 ①]
2023년에도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국제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과도 연이 있거나 국내 인지도가 높은 10인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게재 순서는 사망 일자다. 소중한 이를 잃은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한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 "난 평생 아빠의 응석받이 공주였지"
1968년 2월 1일 미국 텍사스주 멤피스의 한 병원. 팝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갓 태어난 딸 리사 마리를 팔에 안고 흘린 감동의 눈물이다. 엘비스는 이듬해인 1969년, '돈 크라이 대디(Don't Cry Daddy, 아빠 울지마)'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아이의 시선으로, 아빠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인생의 복선이었을까. 엘비스는 리사 마리의 친모, 프리실라와 1973년 이혼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엘비스는 1977년 사망했다.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리사 마리는 엘비스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았다.
리사 마리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싱어송 라이터의 길을 걸었지만,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보다는, 아버지와 연관 있는 작품에 열광했다. 그가 아버지와 듀엣인 것처럼 녹음한 곡들이다. 그 중 하나가 '돈 크라이 대디'였다.
리사 마리의 삶은 외로웠다. 가수 마이클 잭슨(1958~2009)과 1994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로큰롤의 황제'의 딸이 '팝의 황제'의 부인이 됐다"는 말이 나왔지만 둘은 2년 만인 1996년 이혼했다.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와도 결혼했으나 넉 달 만에 헤어졌다. 다른 두 번의 결혼에서 자녀 4명을 뒀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삶이라는 게 얼마나 급작스레 바뀔 수 있는지 잘 안다"며 "누군가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일순 고개를 돌려보면 그는 사라지고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위안이 된 건 아버지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아빠의 영원한 공주님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올해 1월 12일 급서했다. 체중 감량을 위한 약물 복용이 사인 중 하나였다.
오에 겐자부로 "한국에 일본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과도 연이 깊다. 한ㆍ일 관계에도 진보 엘리트로서의 목소리를 내며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며 "그런데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 목소리를 내는 소설과 함께 그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또 다른 기둥은 자전적 이야기들이다. 지적 장애를 가진 장남 히카리를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성장을 그린 소설 『개인적인 체험』이 대표적이다.
그의 사망 당시 기사는 괄호 안 링크에서 볼 수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46816).
사카모토 류이치 "암 두 번 겪으니, 삶이 덧없더라"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음악상을 수상한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올해 3월 28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인 피아니스트이자 현대음악가인 그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해왔으며, 한국에서도 인기를 구가했다. 한국 영화 '남한산성'의 사운드트랙도 그가 작업했다. 그는 2014년엔 인두암, 2020년엔 직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했다.
그는 2021년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타임(Time, 시간)'이라는 앨범을 내놓았는데, 암 투병 중 인생에 대한 고찰을 담아냈다. 그는 당시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앨범의 주제"라며 "인생은 덧없고,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장자가 나비가 돼 날아가는 꿈에서 깨어난 뒤,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는 NYT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무상할 뿐"이라고 말했다.
티나 터너 "굴하지 않고 계속한다면, 삶이 문을 열어준다"
2023년은 유독 대중음악계의 큰 별이 많이 진 해로 기억된다. '로큰롤의 여제'라 불린 티나 터너도 5월 24일 숨을 거뒀다. 84세. 고혈압과 암 등 투병 생활을 오래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 넉 자는 팝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목화농장 등에서 어린 시절부터 일하던 그는 노래를 하고 싶다는 절실함에 1970년대부터 나이트클럽 등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다 첫 남편 아이크를 만나 부부 듀오를 결성,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 1978년 이혼 후 홀로서기를 결심했고, 더 큰 성공을 거머쥐었다. 1984년 낸 앨범은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래미상 역시 수상했다. 터너는 상업적 성공과 명예, 인기를 모두 얻었다. 평생 그는 모두 12번의 그래미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그가 낸 음반들의 총 판매고는 1억장 이상을 기록했으며 1991년엔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5년엔 특별한 업적을 인정받은 예술인에게 주어지는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의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계속한다면, 삶은 결국 문을 열어주게 돼있다"는 말을 남겼다.
절망에 안주하지 않고 희망을 살았던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이 고통으로 점철됐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나의 삶은 멋진 여행과 같았다."
그의 사망 당시 기사는 괄호 안 링크에서 볼 수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5254).
제인 버킨 "그냥, 웃어요. 10년은 젊어지니까."
모두가 탐내는 명품 가방 중 원탑은 샤넬도, 디올도 아닌 버킨백 아닐까. 2023년 12월 현재 3000만원을 훌쩍 호가하는데 전 세계에서 사겠다는 내로라하는 고객이 대기하는 그 가방. 그 버킨백에 영감을 준 배우이자 가수 제인 버킨이 올해 7월 16일 눈을 감았다. 77세.
버킨백의 탄생은 우연이었다. 그가 우연히 에르메스 최고경영자(CEO) 장-루이 뒤마를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났을 때, 버킨이 갖고 있던 밀짚소재 바구니가 기내 선반에서 쏟아졌다고 한다. 내용물을 주워담으며 버킨은 뒤마 CEO에게 "제대로된 크기의 가죽 소재 가방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불평했고, 뒤마는 그를 위한 가방을 디자인했다는 게 정설이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버킨은 도버 해협을 오가며 런던과 파리 등에서 가수와 배우로 활약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함께 출연한 프랑스 배우 겸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와 불같은 연애를 한 뒤 결혼했다. 이후 딸 샤를로뜨를 낳았지만 이혼했다. 딸 역시 부모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버킨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엔 '넌 남자아이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며 "내 외모는 칵테일처럼 여러 가지를 믹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모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버킨은 특유의 쿨한 태도로 "그냥, 웃으세요"라며 "그럼 10년은 젊어지니까"라고 답하곤 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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