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한국 정치에서 저주의 굿판을 거두라
많은 허구 가미된 선·악 대비
영화가 역사 심판의 도구로
변모해 사회분열 심화 우려
86이 뿌린 악의 척결 프레임
거두지 않으면 민주주의 요원
1979년 12·12 사태만큼 지상파 방송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도마에 많이 오른 사건도 드물다. 유명 셰프의 레시피처럼 인터넷에 관련 영상이 넘친다. 이렇게 스포일러 가득한 악조건을 뚫고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명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비결이 뭘까. 김성수 감독이 지난달 22일 회견에서 힌트를 줬다. “그들의 모습을 내 멋대로 만들고 싶었는데 어떤 것이 역사의 기록이고 가상인지 헷갈린다. 내 영화는 많은 허구가 가미된 이야기”라는 요지로 말했는데 바로 선과 악의 극한 대비가 흥행으로 이어진 듯하다. 전두광(전두환) 등 12·12 반란세력은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는 ‘슈퍼 빌런(악당)’이다. 당연히 정상호(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이태신(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정의를 지키는 히어로(영웅)다. 배트맨, 슈퍼맨 등 미국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즐겨쓰는 권선징악 구도는 2시간 20분 내내 관객을 몰입감으로 인도한다.
유감스럽지만 선·악의 과장은 예술성 측면에선 낙제 요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18년 절대권력이 사라졌지만, 권력의 빈자리를 탐내는 자들이 더 짙은 어둠을 끌고 왔다’는 자막을 내세워 신군부를 악의 세력으로 지목한다. 계엄법에 의거 10·26 사태의 수사권을 부여받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살해범 김동규(김재규)와 저녁 식사를 위해 시해 현장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고 김동규와 사건 직후 육군본부로 동행한 정상호의 행적을 수사해야 할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 인물의 인간적인 고민 과정은 물론 관객들이 누려야 할 카타르시스마저 ‘순삭’당하는 건 당연지사다. 대신 악마 전두광의 웃음소리, 하나회의 축하파티와 기념촬영이 관객들의 분노 토로용으로 서비스된다.
서울의 봄의 비극은 2023년 12월 겨울로 이어진다. 야당은 검사 출신 윤석열의 정부를 빗대 군부독재에 ‘검(檢)부독재’를 대입시키고 여당은 자신들을 하나회를 해체한 김영삼의 후예로 자처한다. 보수단체가 교사들의 학생 단체관람을 문제 삼자 진보단체는 전두환의 무궁화 대훈장 추탈 촉구 청원에 나선다. 김 감독의 말처럼 재미로 만든 영화가 역사 심판 도구로 변모해 사회 분열을 심화시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더욱 안타까운 건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학생운동으로 한국 정치 주류가 된 ‘86그룹’이 그 선·악 이분법에 갇혀 이젠 한국 정계 퇴출 1순위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인류학자 김은희는 “이들에게 민주화와 친일청산은 나쁜 놈을 응징하고 착한 사람은 예우하는 권선징악적 도덕주의를 실천하는 것 같다”면서 86을 환생한 조선의 양반으로 규정한다. 넥타이부대와 함께 이룬 1987년 6·10 항쟁의 전리품으로 도덕적 우월성까지 독차지한 86은 내로남불의 대명사가 됐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사건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매표 행위다. 그의 구속으로 86 용퇴론이 재점화되자 “한 사람의 과오를 86 전체로 일반화하지 말라”는 항변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국회의원과 당 대표직, 주요 장관직까지 품앗이한 것도 모자란 듯 허기를 호소한다. 도덕성으로 둔갑한 식탐 앞에 법치는 하위개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들이 더불어민주당을 통해 ‘86운동권 셀프 특혜법’으로 불리는 민주화 유공자법을 강행 처리하려는 행태는 전두광의 웃음소리만큼 공포스럽다. 그러면서도 “하나회처럼 모여 ‘한번 해 먹자’고 한 적 없다”며 선·악으로 갈라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도올 김용옥에 따르면 노자 등 동양 고전에서 착함(善)의 반대는 착하지 않음(不善)이었다. 천사와 악마를 대비하는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미워할 오(惡)’가 ‘착할 선’의 대척 개념 ‘나쁠 악(惡)’으로 의미가 확장됐다는 것이다. 혐오는 좋아질 소지를 내포하지만, 악은 용서와 타협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런 선·악 구도하에서는 척결 대상이 전두환 1인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문재인정부의 검찰 수사로 밝히지 못한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혐의를 다시 끄집어내 특검을 고집하는 것도 그 연장선 아닌지 묻고 싶다. 한국 정치에서 저주의 굿판을 거둘 때다. 그러지 않는 한 1950년대 영국 언론의 지적처럼 한국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기다리기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먼저 피는 걸 기대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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