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보신각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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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 동안 보신각을 관리해 오던 '종지기' 집안의 후손이 가업을 잇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요컨대 보신각을 관리하는 공무원으로 임명해 달라는 말이다.
공무원을 세습하다니 터무니없다는 반응이 대세지만, 대대로 보신각을 관리한 공로를 인정해 주자는 의견도 있다.
조씨 집안 조상 한 사람이 한때 보신각을 관리하는 종감을 지낸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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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 동안 보신각을 관리해 오던 ‘종지기’ 집안의 후손이 가업을 잇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요컨대 보신각을 관리하는 공무원으로 임명해 달라는 말이다. 서울시는 공무원 자리를 세습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동아일보, 2023. 12. 6)
여론은 둘로 갈리는 모양새다. 공무원을 세습하다니 터무니없다는 반응이 대세지만, 대대로 보신각을 관리한 공로를 인정해 주자는 의견도 있다. 찬반을 정하기에 앞서 대대로 보신각 종지기였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검증하는 게 우선이다. ‘지기[直]’는 관리인이다. 산을 관리하면 ‘산지기’, 묘를 관리하면 ‘묘지기’다. 국가시설 관리인도 ‘지기’다. 사직단 관리인은 ‘단지기’, 수표교 관리인은 ‘수표지기’다. 보신각은 조선시대에 종각으로 불렀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을 아무리 찾아봐도 종각 관리인을 ‘종지기’라고 부른 적은 없다. 교회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땅에 종지기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종각 관리인은 ‘종각 습독관’이다. 제때 종을 치지 못하거나 누군가 함부로 종을 치면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종각 습독관은 무관직이다. 세습이 아니라 임명직이다. 재직기간도 길지 않다. 종각 습독관은 1895년 종감으로 개칭했다. 이미 종각이 제 기능을 잃어가던 시기다. 종감은 곧 폐지되었다가 1899년 6월 부활했다. 이때 종감에 임명된 사람이 박경선과 ‘조영희’다.(각부청의서존안, 1900. 3. 31) 조영희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자. 이후 종감은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폐지된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종각에 별도 관리자를 두지 않았다.
없던 ‘종지기’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1961년이다. 서울시 고적감시원 ‘조한이’다. 그는 부친 조영희가 보신각 ‘감독’이 되어 보신각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899년 종감에 임명된 조영희를 말한다. 조한이가 어떻게 고적감시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친이 종감을 지냈다는 사실을 내세웠던 듯하다. 그는 부친이 1대, 자신이 2대 종지기라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61. 8. 15) 조한이는 1962년 작고하고 아들 조진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대대로 보신각을 관리했다는 명분을 내세운 모양이다. 그런데 조진호는 조한이가 4대, 자신이 5대라고 주장했다. 종지기의 역사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조선일보, 1962. 7. 30) 이때부터 조진호는 보신각 주인 행세를 하며 2006년 작고할 때까지 43년간 타종 행사를 주관했다.
정리하자. 조한이는 해방과 6·25 직후 혼란한 시기에 종감 조영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서울시 고적감시원이 되었다. 조한이가 작고하자 아들 조진호가 그 자리를 세습했다. 조진호 역시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아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신철민 서울시 주무관이 대신했다. 이제 그 자리를 조진호의 손자가 넘보고 있다. 180년 가업을 잇게 해 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손자를 탓하는 건 아니다. 집안에서 들은 이야기를 믿었을 테니.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으면 의심해야 한다. 조한이는 자기가 2대 종지기라고 했고, 조진호는 수많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5대 종지기라고 했다. 그런데 조진호의 손자는 조진호가 4대, 신철민 주무관이 5대, 자기가 6대라고 한다. 이렇게 말이 바뀌니 믿을 수 있겠는가. 서울시에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세습을 끊은 것으로 서울시는 할 일을 다 했다.
조씨 집안 조상 한 사람이 한때 보신각을 관리하는 종감을 지낸 건 사실이다. 조상이 정성을 쏟은 곳이니 대가 없이 돌보겠다면 아름답다. 하지만 권리를 내세운다면 어떨까. 한 집안이 근거 없이 대를 이어 타종 행사를 주관했다는 것은 보신각의 흑역사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아야 한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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