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트란스트뢰메르, ‘반쯤 열린 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주로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특정 시기를 제외하면, 오로지 시선과 관찰로써 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면 언제든 발견할 수 있을 법한 장면으로 우리에게 경이를 볼 수 있게 했고, 우리 각자가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둔 기억조차도 장면으로 꺼내어 돌연 새로운 독대를 청하기도 했다. 그는 인지 가능한 세계라면 꿈이든 기억이든 상상이든 간에, 현실 세계의 연장선으로 파악했다. 그의 솜씨에 선연하게 그려지지 않을 것은 없었다.
요즘처럼 혹한의 나날 속에서라면, 스웨덴의 겨울 날씨 속에서 태어났을 이런 시가 자연스럽게 내 창문에 당도하는 느낌이 든다. ‘버스가 겨울 저녁을 뚫고 기어간다./ 좁고 깊은 죽은 운하 같은 가문비나무 숲길에서/ 버스가 배처럼 깜빡거린다.// 몇 안 되는 승객. 몇은 노인, 몇은 아주 젊은이./ 만일 버스가 멈추어 불을 끈다면/ 세계가 삭제되리라.’(‘겨울의 공식’)
시인은 그저 멀찌감치에서 카메라가 된 듯 우리에게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시를 읽고 장면을 그려봄으로써 시인과 나란히 이 장면을 목격한 적 있는 자가 된다. 이 장면에 연루된다. 그리고 애정이 생긴다. 그럼으로써 이 장면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꼭꼭 닫아두었던 우리의 문을 반쯤 열어두게 된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 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미완의 천국’)
시인은 우리들 각자가 문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지 않는다. 시인의 눈에는 이미 우리들 각자가 문이다. 반쯤 열린 문. 이 문은 하나의 비유에 불과한 문일까. 실재하는 문일까. 이 아름다운 문장이 실재하는 장면이 되느냐 아니냐는 독자의 삶에 달렸다. 해석하기 나름인 문제가 아니라.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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