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끝의 역사 공존하는, 긴장감 어린 이 곳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12. 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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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모든 것이 중첩하는 땅, 하코다테에 가다

[김찬호 기자]

이제 기차는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홋카이도의 최남단, 하코다테로 향하는 길입니다.

홋카이도는 일본 안에서도 독특한 땅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일본의 역사 밖에 있던 땅이었으니까요. 이 땅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개척과 개발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또 나름대로 독특한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하코다테의 밤
ⓒ Widerstand
 하코다테는 그런 홋카이도 안에서도 특수한 지역입니다. 일단 이름부터가 그렇죠. 물론 다른 설도 있지만, 하코다테(函館)는 일본식의 지명이죠.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은 이름을 아이누어에서 따온 경우가 많습니다. 삿포로(札幌)는 '마르고 큰 땅'이라는 뜻이고, 왓카나이(稚内)는 '차가운 냇가'라는 뜻입니다. 한자는 나중에 발음만 따서 붙인 것이죠.

하지만 하코다테는 다릅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성을 쌓고, 그 성관(城館)이 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하코다테(函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하코다테
ⓒ Widerstand
 두 세력이 긴장을 이루던 공간

하코다테는 혼슈와 가까이 있는 도시입니다. 하코다테에서 혼슈까지는 30km 정도 떨어져 있죠. 이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부터 일본의 영향력이 컸던 땅이죠.

에도 막부는 홋카이도 남부에 자리잡은 마쓰마에 가문에게 홋카이도 지배를 일임했습니다. 당시에는 홋카이도를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습니다. 마쓰마에 가문은 아이누인들과 무역을 하고 때로 전투를 벌이며 교류했습니다.

이때 마쓰마에 가문이 중심 항구로 삼았던 곳 중 하나가 하코다테였습니다. 하코다테는 넓은 평야와 만을 끼고 있어 입지가 탁월했죠.

하코다테는 행정 중심지로까지 성장했습니다. 1702년에는 마쓰마에의 중심지였던 가메다(亀田)가 홍수 피해를 입으면서 하코다테로 관청이 옮겨 왔죠. 하코다테는 에도 시대 일본이 아이누와 교역하는 최전선이었습니다. 아이누와 일본이라는 두 세력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현장이었죠.
 
 하코다테 구 공회당
ⓒ Widerstand
 두 세력이 긴장을 이루는 공간이라는 점은 하코다테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이누와 일본이었다면, 그 뒤에는 서양 세력과 일본의 경쟁이 이어졌죠.

1854년 에도 막부는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본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죠. 이 조약에서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기로 합니다. 시모다는 개항의 시점도 늦었고, 항구도 크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개항지는 하코다테 뿐이었죠.

하코다테는 그렇게 일본 최초의 개항장이 되었습니다. 막부는 네덜란드와도 교역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데지마(出島)라는 작은 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죠. 규모도 훨씬 작았습니다. 그러니 하코다테야말로 일본의 한 시대를 여는 상징적 도시였습니다.

이후 영국이나 러시아 등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하코다테는 다른 나라에도 문호를 열게 되었습니다. 하코다테 곳곳에 서양 국가의 공사관이 들어섰죠. 하코다테는 영향력을 확대하는 서양 세력과 일본 사이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옛 영국 공사관
ⓒ Widerstand
 일본을 빼고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미국은 서부 개척을 통해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캘리포니아에서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닿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것도 중국으로 가기 전 기항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척을 마치고 연해주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죠. 이 세 세력이 모여 충돌한 지점이 하코다테였습니다.
 고료가쿠
ⓒ Widerstand
 과거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하코다테

한편으로 하코다테는 에도 막부라는 구체제의 종말을 알린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1867년 개혁 세력에 밀린 에도 막부는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합니다. 에도 막부를 이끌던 도쿠가와 가문은 현실정치의 경험도 능력도 없는 덴노가 자신에게 정권을 다시 돌려주리라 생각했죠. 여러 지방 영주들을 참여시킨 연합 정권 정도를 만들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개혁 세력은 강력했습니다. 덴노는 반막부 세력을 등에 업고 왕정복고를 선언했고, 도쿠가와 가문의 땅과 관직을 모두 반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생각 밖의 상황이었습니다. 막부로서는 강력히 반발하고, 세력을 모아 전쟁을 벌여볼 수도 있었겠죠. 막부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으니까요. 하지만 막부의 수장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에도 성의 문을 열고 항복했죠. 그렇게 메이지 신정부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리 순순히 항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신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죠. 그들은 동북 지역에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반대파의 힘은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한 상황이니 더욱 그랬겠죠. 신정부군의 공세에 이들은 서서히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마지막으로 집결한 땅이 바로 하코다테였습니다.

하코다테에서 반정부군은 '에조 공화국'이라는 국가의 건국을 선언하면서까지 맞섰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1869년 신정부의 승리로 끝을 맺었죠. 그렇게 일본 안의 구세력은 완전히 일소됩니다.

마지막까지 하코다테는 구세력과 신세력이 맞붙는 긴장의 현장이었습니다.
 
 고료가쿠 안의 봉행소
ⓒ Widerstand
 지금도 하코다테에는 과거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마쓰마에 가문이 자리잡았던 성도, 옛 관청의 터도 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가 세운 공사관도 남아 있습니다. 관광지가 된 영국 공사관에는 이제 영국식 애프터눈 티를 파는 카페가 들어서 있죠.

이곳에서 사망한 외국인을 위한 외국인 묘지도 있습니다.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만든 별 모양의 성, 고료가쿠는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죠. 일본의 도시답지 않게 옛 도심에는 교회도 몇 개나 모여 있습니다.

에조 공화국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흔적도 남아 있죠. 특히 에조 공화국의 구성원들은 최후까지 막부를 위해 분전한 충신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어, 미디어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유명 만화인 <은혼>도 이 시대의 인물들을 패러디해 만든 것이죠.
 
 하코다테의 교회
ⓒ Widerstand
 삿포로에서 홋카이도를 한 바퀴 돌아 하코다테에 내려왔습니다. 긴 길을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홋카이도라는 섬도, 제가 달려온 길도, 결국 하코다테라는 한 도시로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조치를 다스리려 한 막부도, 홋카이도를 개척한 메이지 정부도, 그 경쟁 상대였던 러시아도, 개척의 롤모델이었던 미국도. 모두 하코다테에 흔적으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하코다테는 홋카이도의 남쪽 끝, 변경(경계 지역)입니다. 동시에 과거 일본 영토의 북쪽 끝에 있는 변경이었죠. 모든 것이 중첩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많은 흔적들이 이 도시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이겠죠.

이것이 변경이 가진 힘이고, 중요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등하고 긴장하는 세력이 한 곳에 모여, 각자의 뚜렷한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는 곳이니까요. 한 세력의 정체성은 중심보다는 오히려 이런 변경에 짙게 남는 법입니다.

그 흔적을 둘러보고 홋카이도를 떠납니다. 홋카이도를 한 바퀴 돌며, 이 땅에 남은 흔적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변경'을 떠나 '본토'로 향하는 마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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