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8개월만 강제 송환…'강남 마약음료 사건' 주범의 정체
26일 오후 3시 40분, 슬리퍼를 신고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이 경찰관에게 양쪽 팔을 붙들린 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왜 학생을 상대로 마약 음료를 줬나” “대치동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남성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미널 밖을 향했다. 지난 4월 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진 ‘마약 음료 시음 및 협박 사건’을 계획하고 지휘한 혐의를 받는 주범 이모(26)씨가 범행 8개월 만에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순간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10월 중국으로 출국했다. 그전까지는 특별히 고정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 등을 했고, 이른바 ‘여성청소년 성매매 근절단’(여청단)에서도 활동했다. 2016년 결성된 여청단은 성매매 근절을 내세워 경기도 일대 유흥가 등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주지 않으면 성매매 사실을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며 유흥업소들로부터 약 10억원을 뜯어냈다. 여청단을 수사한 검찰은 이씨를 포함한 8명을 공동공갈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이씨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불구속 상태로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중 중국으로 도주했다. 경찰은 도피 당시 보이스피싱 등 범죄를 염두에 둔 이씨가 현지에서 계획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파악 중이다.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마약 음료를 만들고, 가짜 시음행사를 통해 집중력 강화 음료라고 속여 학생들에게 마시게 한 뒤 부모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었다.
한국과 중국에 있는 공범들이 그의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던지기 수법’으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의 박모(36)씨, 박씨에게 받은 필로폰 10g을 우유 100병에 넣어 음료를 제조하고 시음행사 아르바이트생에게 공급한 길모(26)씨, 중계기를 사용해 중국 인터넷 전화번호를 국내 번호로 바꿔 부모들에게 협박 전화를 걸 수 있게 도운 김모(39)씨 등이다. 이들의 범행으로 인해 미성년자 13명이 마약 음료를 건네받았고, 이 중 9명은 음료를 마셨다. 또한 이들의 학부모 중 6명이 협박을 당했다.
공범들은 이미 1심 선고를 받은 상태다. 이 가운데 마약음료 제조책인 길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마약음료에 사용한 필로폰을 공급한 혐의를 받는 박씨는 징역 10년, 인터넷 전화번호를 국내 번호로 바꾼 김씨는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범행을 계획하고 지시한 이씨는 중국에 머물러 있어 이날 강제 송환까지 한국에서 수사를 받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인터폴 적색수배서를 발부받고, 주중 대사관과 경찰 주재관 등을 통해 중국 공안부와 핫라인을 가동해 이씨를 추적해왔다. 지난 4월 20일엔 윤희근 경찰청장이 수사 협조를 당부하는 친서를 중국 공안부장에 전달했고, 5월 22일엔 경찰청 실무진이 공안부를 찾아가 이씨 소재와 관련한 단서를 공유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건 발생 52일 만인 지난 5월 24일, 이씨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공안에 의해 검거됐다. 경찰은 이후 인터폴 회의, 윤 청장과 공안부 고위급 간 양자 회담 등을 통해 이씨의 국내 송환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공안부는 지난 20일 이씨의 강제추방을 결정했고, 경찰은 중국 지린성 연길시로 호송 인원을 급파해 이날 이씨를 국내로 데려왔다.
마약 음료 사건을 맡은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향후 이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범행 동기와 과정 등을 조사한 뒤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번 송환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테러와도 같은 마약범죄를 척결하기 위한 한중 경찰의 부단한 노력이 맺은 결실”이라며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든, 범행 후 도피하든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검거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도록 수사공조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윤정민ㆍ오삼권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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