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원장을 비석 세우고 기념까지... 다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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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 기자]
▲ 국립소록도병원 제2대 하나이 원장의 초상화 모습. |
ⓒ 오문수 |
소록도 구북리에서 서생리로 가는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인 '자혜의원'이 있다. 소록도에 있는 자혜의원은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일반 국민의 구료를 목적으로 세워진 '자혜의원'은 1910년 초 당시 전국에 이미 18개소가 있었다. 19번째로 개설된 '소록도 자혜의원'은 나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병원이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설립되었고 동년 7월 10일 '아리까와'를 초대 원장에 임명했다. 1917년 1월부터 본관외 47동 388평을 준공하면서 동년 5월 17일 개청 1주년 기념식을 가진 병원은 연말까지 99명을 수용했다. 초대원장 '아리까와'는 각 도에서 모집해 온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했다.
입원 즉시 입고 온 한복을 벗겨 버리고 '하오리'(일본 남자 상의)와 '하까마'(일본 남자 바지), '오비'(허리띠), '훈도시'(일본 남자 속옷), '게다'(슬리퍼) 등의 일본식 옷으로 바꿔 입혔고 식사도 '오왕'(주발)에 '하시'(젓가락)를 이용해 '다꾸앙'(단무지)을 먹였다. 잠자리 또한 한국식이아닌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는데, 이런 낯선 일본식 생활양식이 환자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 소록도 자혜의원 모습.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이랄 수 있다 |
ⓒ 오문수 |
1921년 6월 23일 '아리까와' 원장의 뒤를 이어 '하나이'가 제2대 원장으로 발령받았다. 군의관 경력을 지낸 경력자라 전임 원장보다 더 엄격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환자들이 얼마 동안 겪어보니 인상과는 달리 자상했다고 한다.
원장은 제일 먼저 일본식 생활양식을 폐지해 옷도 편할 대로 입게 하고 식사도 각 병사별로 직접 지어먹도록 해줬다. 하나이 원장은 재임 중 여러 가지 제도를 개선했다. 본가와의 통신과 가족의 면회도 허용하고 고향 방문도 제한적이지만 허용했다. 신앙의 자유도 보장하여 자기 종교를 따를 수 있도록 했다. 하나이 원장은 독서를 장려하고 악극이나 창극, 연극을 공연케 하며 영화를 상영하고 지방에서 연예단을 초빙하는 등 환자들의 이탈 행동 방지에 노력했다.
환자들은 일본인이면서도 나환자들을 가족같이 아껴주고 헌신적이며 인자한 원장에게 감동했다. 환자들은 하나이 원장의 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기로 논의한 끝에 창덕비를 건립키로 하고, 건립 기금은 환자들이 형편에 따라 기부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하나이 원장이 창덕비 건립 사실을 알고 나서 환자대표를 불러 비 건립을 극구 사양하면서 "끝내 세우겠다면 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완강하게 사양해 환자들은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1929년 10월 16일 하나이 원장이 관사에서 순직하자, 환자들은 가슴에 리본을 달고 장례식을 성대히 거행한 후 다음 해에 하나이 원장의 창덕비를 세웠다. 자혜의원 뒤편 비석에는 '화정원장창덕비(花井院長彰德碑)'란 글씨가 적혀 있고 옆에 세워진 한글 안내판을 보니 1930년대에 세워진 '하나이 원장 창덕비'다. 다음은 안내문 내용이다.
▲ 소록도 자혜의원 뒤편에 세워진 '하나이' 원장 창덕비 모습. |
ⓒ 오문수 |
"'하나이 젠키치' 원장은 1921년 6월 23일부터 1929년 10월 16일까지 8년 4개월 동안 제2대 원장으로 재직하다 소록도에서 사망했다. 그는 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원 초기부터 강요했던 일본식 생활양식을 폐지하였으며 본가와의 통신이나 면회,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하고 환자 교육에 있어서도 3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독서를 장려하는 등 교육 기회도 부여했다.
또한 체육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조성하고 환자 위안회를 조직하여 단조로운 수용 생활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환자들로부터 인자한 원장으로 추앙받았다.
일본인이면서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아껴주고 인자하게 대해준 원장의 배려에 감동한 환자들이 직접 경비를 모금하여 이 비석을 세웠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의 일제 잔재 청산 정책에 의해 비석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환자들이 몰래 땅에 묻었다가 1961년 5.16 이후에 다시 발굴해 중앙공원 입구에 세웠으며 1988년에 원래 장소인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한반도를 수차례 침략하고 36년 동안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인을 한국인이 칭송하고 비석까지 세운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환자들의 존경을 받은 하나이 원장에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 제4대 '수호' 원장은 악랄한 간호장 '사또'를 앞세워 환자들을 폭압으로 다스리고 자신의 동상을 세워 매월 20일마다 전 환자들을 동상 앞에 집합시켜 참배시키다 이춘상에게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 자신의 동상을 세워 환자들로 하여금 매월 20일마다 참배케 하고 환자들을 폭압으로 다스린 제4대 '수호' 원장을 살해(1942.6.20) 후 사형당했다는 이춘상의거 기념비 모습.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다. |
ⓒ 오문수 |
어떤 인류애는 국경을 초월하기도 한다. 일본인이지만 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한 하나이 원장, 그 원장의 동상이 '일제 청산'을 이유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환자들이 몰래 땅속에 파묻었다가 발굴해 원래 위치인 자혜의원 뒤편에 세워서까지 기념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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