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풀타임' 김지원 세터, 이렇게 잘할 줄이야
[양형석 기자]
올해 한국 여자배구는 작년에 이어 우울한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V리그가 끝난 후 출전했던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는 12전 전패 승점 0점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전패와 승점 0점이라는 치욕적인 결과였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출전했던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베트남에게 2-3 패배를 당한 데 이어 태국에게도 0-3 완패를 당하면서 4강 진출에 실패했다.
배구팬들은 내심 최근 3번의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메달을 땄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의 명예회복을 기대했다. 하지만 한국은 아시안게임 첫 상대로 다시 만난 베트남에게 두 세트를 먼저 따낸 후 내리 세 세트를 내주는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8강리그에서 중국에게 0-3으로 패하면서 17년 만에 노메달에 그쳤다. 2021년 대표팀에 부임했던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잘레스 감독은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곧바로 경질됐다.
2년 동안 국제대회에서 엄청난 부진을 면치 못한 한국 여자배구는 10위권 언저리를 맴돌던 세계랭킹이 40위까지 뚝 떨어졌다. 하지만 선수들은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1승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인 선수도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대표팀 생활을 경험한 후 이번 시즌 V리그에서 세트부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는 GS칼텍스 KIXX의 주전 세터 김지원이 그 주인공이다.
▲ 김지원 세터는 지난 8월 컵대회에서 GS칼텍스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며 라이징스타상을 수상했다. |
ⓒ GS칼텍스 KIXX |
1990년대 호남정유와 LG정유라는 이름으로 겨울리그 9연패를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GS칼텍스는 2000년대 들어 현대건설에게 최강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GS칼텍스는 프로 출범 후 세 번의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지만 최하위에 머문 시즌도 세 번이나 됐다. GS칼텍스는 다행히 신인 드래프트 현장에서 시행되는 '구슬뽑기' 운이 매우 좋아 프로 출범 후 열린 20번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무려 7번이나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었다.
프로 원년부터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GS칼텍스는 일신여상 시절부터 '여자 김세진'으로 불리던 184cm의 아포짓 스파이커 나혜원을 지명했다. 하지만 나혜원은 삼성화재의 9연패를 이끈 김세진(한국배구연맹 운영본부장)처럼 GS칼텍스의 핵심선수로 성장하지 못했다. 2010-2011시즌까지 GS칼텍스에서 활약한 나혜원은 2011년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이적했지만 무릎부상 여파로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GS칼텍스는 2006-2007 시즌 또 다시 1순위 지명권을 얻어 한수지 '세터'를 선택했다. 한수지는 2007년 GS칼텍스가 FA 이숙자 세터(정관장 레드스파크스 코치)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 지명을 받고 1년 만에 팀을 떠났다가 2019년 미들블로커로 변신해 GS칼텍스로 컴백했다. 2007-2008 시즌 1순위 배유나(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는 GS칼텍스에서 9시즌 동안 활약하며 두 번의 챔프전 우승을 안기고 FA자격을 얻어 팀을 떠났다.
GS칼텍스의 1순위 신인지명 중 최고로 꼽히는 선수는 2012-2013 시즌의 이소영(정관장)과 2015-2016 시즌의 강소휘였다. 루키 시즌부터 '아기용병'으로 불리며 좋은 활약을 해주던 이소영은 V리그 최고의 공수겸장 아웃사이드히터로 성장했고 강소휘 역시 꾸준한 성장으로 이소영에 이어 GS칼텍스의 간판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이소영과 강소휘는 2020-2021 시즌 정규리그에서 796득점을 합작하며 GS칼텍스의 '트레블'을 이끌기도 했다.
GS칼텍스는 2017-2018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35%의 확률을 뚫고 1순위 지명권을 따냈지만 확실한 대어가 없어 지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GS칼텍스는 장고 끝에 수원전산여고(현 한봄고)의 멀티플레이어 한수진을 지명했다. 한수진은 고교 시절 미들블로커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섭렵했던 '만능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프로입단 후에는 어쩔 수 없는 신장(165cm)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재는 리베로로 활약하고 있다.
▲ 김지원 세터(오른쪽)는 이번 시즌 득점,공격 1위 지젤 실바와도 뛰어난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
ⓒ GS칼텍스 KIXX |
한봄고 재학 시절 아웃사이드히터와 아포짓 스파이커를 오가던 김지원은 제천여고 전학 후 세터에 전념했다. 하지만 2020-2021 시즌을 앞두고 GS칼텍스에는 주전 안혜진 세터와 트레이드로 영입한 이원정 세터(흥국생명)가 버티고 있었다. 따라서 배구팬들은 남성여고의 이선우(정관장)나 한봄고의 최정민(IBK기업은행 알토스)을 유력한 1순위 후보로 전망했다. 하지만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차상현 감독은 김지원을 호명했다.
김지원은 루키 시즌 백업세터로 간간이 경기에 출전하다가 2020년 12월 훈련도중 발목인대가 파열되면서 시즌 아웃됐다. 2년 차 시즌이었던 2021-2022 시즌에는 24경기에 출전하며 부상이 잦은 이원정 세터 대신 안혜진 세터의 백업으로 활약했지만 시즌 후반 손가락을 다치면서 다시 아쉽게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김지원은 작년 컵대회 토너먼트에서 주전으로 나서 GS칼텍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차상현 감독과 배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지원 세터는 지난 시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안혜진 세터 대신 주전으로 출전하는 경기가 늘어났다. GS칼텍스에서도 작년 연말 이원정 세터를 흥국생명으로 트레이드하면서 김지원 세터가 팀 내 '넘버2 세터'임을 공식화했다. GS칼텍스는 2022-2023 시즌이 끝나고 주전세터 안혜진이 어깨수술을 받으면서 사실상 이번 시즌 출전이 불투명해졌고 김지원 세터는 프로 데뷔 네 시즌 만에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의 기회를 얻었다.
올해 컵대회에서 GS칼텍스의 2연패를 이끌며 라이징스타상을 수상한 김지원 세터는 V리그 개막 후에도 GS칼텍스가 치른 18경기에 모두 출전해 세트당 11.89개의 세트를 기록하며 이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세트 부문 순위가 좋은 세터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데뷔 첫 풀타임 시즌을 소화하고 있는 김지원 세터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활약을 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시즌 GS칼텍스의 아시아쿼터 선수인 필리핀 국가대표 세터 아이리스 톨레나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기량으로 루키 이윤신 세터에게도 밀리고 있다. 이번 시즌 69.42%의 세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주전세터 김지원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2023년 한 해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한 김지원 세터는 GS칼텍스의 주전세터로서 안정된 활약을 통해 3라운드까지 팀을 당당히 상위권으로 올려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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