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정통론' 첫 사학자 안정복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단재 신채호가 망명길에 나서면서 짊어지고 갔던 유일한 책이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이다. 저자의 후손으로부터 자료를 빌려 손수 필사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저자와 가치에 대해 말했다.
안정복은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백년 이래 유일한 사학전문가라 할 수 있다.(…)연구의 정밀함은 선생의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지리의 잘못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가장 공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숙종 38년 12월 25일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순(百順)이고 호는 순암(順庵)이다. 아버지는 미관말직을 지낸 안극(安極)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참의를 지낸 할아버지(안취)가 울산부사를 지냈다.
안정복은 부모가 제천과 서울, 어머니의 고향인 영광과 울산·무주 등지를 오가며 살았기에 그도 잦은 이사를 하며 새로운 풍물을 접하며 유년기를 보내었다. 15살 때 할아버지가 울산부사를 사임하면서 전북 무주에 은거하여 그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그후 25살이 될 때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두루 배우고 성장하면서 독습으로 주자학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은 이웃에 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과의 만남이었다.
순암이 35세 때인 1746년, 이웃 안산에 사는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을 찾아 나섰다. 젊은 순암을 대한 성호는, 가을 바람과 샅이 같이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순암 역시 그때에야 참다운 스승을 만나 많은 담론을 나누었고 의견을 교환했다.
순암은 학문에 의문이 있을 때에는 직접 찾아 물어보기도 하였고, 편지로 질문하기도 하였다. 성호는 21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다를 때에는 재삼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입장을 취했다.(이이화, <안정복>,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그는 벼슬길보다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호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학문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관직이 있어야 했다. 스승의 추천으로 38살 때에 만녕전 참봉으로 부임하고, 43살 때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그의 가계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이어서 능력에 비해 미관말직이었다. 그나마 부친상을 당하면서 관직을 떠나 광주로 퇴거하여 다시 학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역사연구에 매진했다. 우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 등에서 나타난 모화사상을 배격하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제시하였다.
내가 여러 사서(史書)를 읽어보고, 개연히 바로 잡을 뜻을 가지고, 동사(東史)를 널리 취하고, 중국사에서 동쪽의 일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대저 사가의 대법(大法)은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을 엄히 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전장(典章)을 상고하는 것이다.(<동사강목>)
그는 45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동사강목>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동사강목>의 범례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계통은, 사가가 책 머리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데, <동국통감>은 단군·기자의 사적을 별도의 외기(外記)로 삼았으니 그 의의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정통을 기자에서 시작하고 단군을 기자가 동래(東來)한 아래에 붙였는데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편수 삼진(三晋)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안정복은 우리 나라의 정통이 단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계통을,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고려 태조라하였다. 위만은 권력을 찬탈한 도적이기에 제외시켰다. 우리 사서에서 단군을 시조로 하고 삼한정통론을 제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아쉬운 대목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동사강목>에 담긴 민족사상의 대강을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외래 침략자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을 특히 서술하고, 충신과 명장들의 빛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과 고려의 대 거란·몽고 전쟁 등에서 조국의 수호를 위한 민중의 분투와 을지문덕·강감찬·서희 등 뛰어난 인물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우리 민족의 용감성을 자랑하는 한편, 신라 통일 이후 문치를 숭상하고 국방에 관심을 돌리지 않아 나라가 약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2. 봉건국가의 대민정책이 착취에만 치중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것을 비평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진대법(賑貸法) 시행에 관한 만설(挽說)에서, 무상으로 주는 것은 좋지만 빌려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고, 빌려주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국가의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논파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의 노비안진법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문종 때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옥사에 분격하여 옥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과 그 개혁을 주장하였다.(이우성, <해제 동사강목>)
안정복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 사관을 탈피하여 단군을 국조로하는 사관을 정립하면서 <동사강목>을 편찬하였다. 4년여 동안 오로지 여기에 매달렸다. 전체 17권이지만 각 권은 상하로 나누어져 실제는 34책이나 된다. <고려사절요>가 3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편찬한 책이 35책인 것에 비해 <동사강목>은 순전히 개인의 힘으로 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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