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의·약사 논쟁 ‘성분명 처방’…의약품 수급책 될까
약사 “의약품 품귀 현상 해소” vs 의사 “동등한 약효 담보 못해”
불안정한 원료의약품 수급, 감기와 인플루엔자(독감) 환자 급증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의약품 품절 사태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일각에서 ‘성분명 처방’이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의약 분업 추진 이후 성분명 처방을 둘러싼 의사·약사 간 논쟁이 20년 넘게 이어지며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양측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21일 의약계에 따르면, 서울시약사회를 비롯한 약사단체들은 성분명 처방 제도화를 목표로 갖고 있다. 서울시약사회는 관련 TF(테스크포스)팀을 꾸려 다양한 주체와 간담회를 진행하거나, 성분명 처방을 소개하는 약봉투를 약국에 배포하는 등 활발한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성분명 처방이란 의사가 처방전에 특정 제약사의 약제 상표명을 기재하는 대신 성분명을 적도록 한 것이다. 약사는 해당 성분과 함량 등을 확인한 뒤 제품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처럼 의약품명으로 처방하는 게 아니라, 타이레놀의 성분명인 ‘아세트아미노펜’으로 처방해 약의 효능과 용량이 동일한 의약품을 조제·판매하는 식이다.
성분명 처방은 20년이 넘은 의·약사 간 논쟁거리다. 지난 2000년 진료 후 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업무와 처방된 약물을 제공하는 약사의 업무를 양분한 의약분업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분명 처방은 잊을만하면 재소환 돼 의·약사 갈등을 촉발하기도 한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분명 처방 도입을 주문한 데 대해 의료계가 반발한 바 있다.
약사들은 성분명 처방이 장기화되고 있는 의약품 품절 사태를 해결하고, 부적절한 약 복용을 방지하는 동시에 버려지는 약을 줄여 환경에도 긍정적이라는 찬성 입장이다. 이은경 서울시약사회 부회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약국에 약이 이미 품절되고 없는데 의사가 품절된 약을 처방했을 때 답답한 마음이 커진다”며 “요즘 같이 의약품이 부족할 때 약사들은 아침에 약국 문을 열자마자 도매상에 남아 있는 약이 있는지 찾아보고 재빨리 구매해 입고하는 게 숙제처럼 됐다”고 말했다.
의약품 수급 불안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최근 감기와 독감, 마이코플라스마 폐렴 등 호흡기 감염병이 동시에 유행하면서 의약품 품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독감의 경우 최근 5년(2019년~2023년)간 올해 가장 큰 발생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표본감시기관 196곳을 대상으로 외래환자 1000명당 인플루엔자 의심환자를 살펴본 결과, 12월 둘째주(3~9일) 기준 61.3명이 집계됐다. 12월 첫째주 48.6명에서 일주일 만에 60명대를 넘어섰다. 질병청은 “지난 11월 항바이러스제 31만6000명분을 시장에 공급한 데 이어 125만6000명분을 추가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의약품 수급이 어려울 때 성분명 처방으로 돌리면 상대적으로 재고에 여유가 있는 약품으로 조제해 품귀 현상을 어느 정도 해소할 것이란 게 약사들의 주장이다. 이 부회장은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면 특정 회사의 약이 없을 때 성분이 동일한 다른 약으로 대체해 품절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해열진통제나 항생제, 위산분비억제제 등 주로 많이 쓰이는 10가지 품목들에 한해 시범사업 형태로 시행하면 약 품절에 따른 환자 불편·불안을 줄이고 일선 약사들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폐기되는 의약품을 줄이고 부적절한 복용을 방지해 건강보험 재정에 긍정적일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부회장은 “이비인후과 약이든 정형외과 약이든 굳이 안 써도 되는데 어디에나 들어가는 게 위점막보호제다. 관절약 한 알에 200~300원 하는데,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위점막보호제가 더 비쌀 때가 있다”면서 “동일한 성분인데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되는 의약품이 한해 수십에서 수백 톤(t)에 달해 성분명 처방은 환경적으로도 득이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의사들은 주성분이 같더라도 복제약품(제네릭)과 오리지널약품 간 약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오히려 환자 피해를 키울 수 있다고 반대한다. 복제약의 경우 현재 판매되고 있는 의약품과 동등한 약효를 갖는지 입증하는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기준약 대비 그 효과가 80~125% 범위를 충족하면 돼서 동등한 약효를 담보할 수 없단 입장이다.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은 “의사들이 제네릭보다 오리지널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무리 성분이 같아도 약효의 폭은 의약품들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라며 “의사들은 위험성을 감수하기보다 환자 반응을 살피면서 이상이 없으면 평소 잘 듣는 약을 계속 쓰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신광철 대한이비인후과의사회 공보부회장은 “성분명 처방은 국민 편의성이나 약의 안전성 측면에서 따져봤을 때 실익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면 의약품 부족 현상이 해소될 것이란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현재 품귀현상을 빚는 약들은 어느 특정 회사의 것만이 아니다. 성분이 같은 약들 모두 비슷한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부족한 약들은 원료 구하기도 힘들고 대부분 저가 의약품으로 수익이 안 나기 때문에 만드는 회사도 얼마 되지 않는다”며 “성분명 처방을 도입한다고 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없다”고 짚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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