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좋은 엔비디아” “비전 부족한 인텔”… 반도체 업계 기싸움
“엔비디아는 순전히 엄청나게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들은 원래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가 팻 겔싱어(사진) 인텔 최고경영자(CEO)와의 대담 영상을 공개한 직후 실리콘밸리가 발칵 뒤집혔다. 겔싱어 CEO는 엔비디아의 성공에 대해 단순히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들던 기업에 행운이 찾아온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엔비디아가 AI 칩 시장에서 지금의 우위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단언할 수 없다며 꺼낸 발언이었다.
엔비디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브라이언 카탄자로 엔비디아 부사장은 지난 21일 자신의 X(옛 트위터)에서 “엔비디아의 영향력은 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뚜렷한 비전과 실행력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는 인텔에는 부족했던 요소”라고 정면 반박했다.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인텔과 경쟁하는 AMD도 이번에는 엔비디아 때리기에 가세했다. AMD는 최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자사가 출시한 AI 칩 MI300X이 엔비디아의 H100보다 성능 면에서 뛰어났다며 테스트 결과를 게시했다. 엔비디아가 “AMD는 의도적으로 H100에 불리한 환경에서 성능을 측정한 뒤 발표했다”며 비난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인텔과 AMD는 AI 반도체 시장을 선점한 엔비디아에 맞서 AI 칩을 잇달아 내놓은 바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난타전이 벌어지고 있다. 내년 크게 성장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AI 칩 시장을 둘러싸고 곳곳에서 새로운 경쟁 구도가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타 업종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업계에서도 경쟁 기업의 CEO나 제품 성능을 거론해가며 비난하는 일은 금기시됐다. 하지만 생성형 AI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반도체 시장이 열리면서 기존의 시장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본래 게임용 고화질 이미지를 처리하기 위한 제품을 만들며 업계에서 ‘변방’ 취급받던 엔비디아가 단번에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300조원) 클럽에 올라선 것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경쟁하지 않을 것 같았던 기업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며 “서로 경쟁사를 걸고넘어져야 할 정도로 주도권 다툼이 급해졌다”고 말했다.
x86 설계 방식을 앞세워 CPU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한 인텔 역시 급격한 시장 변화 속 변화에 내몰렸다. ‘반도체 거인’으로 불리며 수십 년 동안 세계 반도체 매출 1위를 차지했던 인텔은 올 3분기까지 7개 분기 연속 역성장으로 체면을 구겼다.
2021년 겔싱어가 취임한 직후 인텔은 파운드리와 AI에 집중했다. 우선 AI 칩 시장을 노리고 가우디3를 출시해 엔비디아·AMD와 경쟁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에도 재진출하며 내년부터 TSMC·삼성전자보다 이른 2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 양산을 공언하기도 했다. 거친 입의 배경엔 차세대 파운드리·AI 칩 경쟁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다는 다급함이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은 삼성의 가장 큰 우군으로 꼽힌다. 시장점유율 90% 이상인 인텔의 서버용 프로세서는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메모리 제품의 최대 수요처 중 하나다. 양사는 차세대 서버용 D램 분야에서 공동 연구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반대로 파운드리 업계에서 인텔의 전면적 공세는 곧바로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에 위협으로 꼽힌다. 인텔은 지난 22일 네덜란드 ASML로부터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요한 하이 NA 극자외선(EUV) 장비를 가장 먼저 공급받기 시작했다. 삼성과 TSMC는 2025년에야 이 장비를 납품받을 것이 유력하다. 미래 반도체 수주 경쟁에서 인텔이 유리한 고지를 먼저 확보한 셈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기술 주도권 변화에 따라 1등 자리에서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는 게 반도체 업계”라며 “시장 흐름을 읽으면서 기술 투자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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